오피니언

종교비판에서 신앙성찰로(11):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적 통찰을 중심으로

글 · 파울로 연세대학교 신학박사(Ph. D.)

5.3 삶의 차원에서의 신앙과 사랑의 모순

'있음'과 '앎'의 차원에서의 모순은 기독교의 형식과 내용을 이루는 신앙과 사랑 사이의 모순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른 바 '삶'의 차원에서 종교의 모순이 신앙과 사랑의 관계에서 극명하게 표출되는 것이다.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사랑은 종교의 내용으로서 숨겨진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고 신앙은 종교의 의식적인 형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랑이 신과 인간을, 즉 인간과 인간을 동일화 하는 반면에 신앙은 신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하고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한다는 얘기다. 신앙은 신을 하나의 특수한 다른 본질로 만드나 사랑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랑으로서 신을 일반화하여 보통 존재로 만든다. 신앙이 인간 내부에서 자기 자신과 분열시키는 역할을 하는 반면, 사랑은 신앙이 인간의 마음 속에 분열로 나타난 상처를 치유한다.

또 신앙은 규정성의 특징 때문인지 신의 명령에 의존해 신에 대해 율법적이다. 하지만 사랑은 그런 율법적인 신앙으로부터 인간을 자유하게 한다. 신앙은 이처럼 배타성에 근거해 신앙인과 비신앙인을 구분해 무신론자를 양산해 내며 그들을 배제하고 저주하지만 사랑은 그 자체가 무신론적이기에 구분이 없고 따라서 무신론자를 저주하지 않는다. 비종교적 사랑과 달리 신앙에서는 부분적이며 제한적인 사랑만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신앙 안에서 사랑의 보편적 속성이 훼손되고 축소, 왜곡되고 있는데 포이어바흐는 그 원인을 신앙의 당파성에서 찾았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당파적이다. 그리스도를 찬성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사람이다. 나를 찬성하는가 또는 나를 반대하는가 둘 가운데 하나다. 신앙은 적 또는 친구만을 알고 있을 뿐 비당파성을 알지 못한다. 신앙은 오로지 그 자체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관용을 모른다. 그것이 본질적인 이유는 신앙은 언제나 신앙의 일은 신의 일이고 신앙의 명예라고 하는 망상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앙에는 이른 바, 회색 지대가 없다는 것이다. 같음 아니면 틀림이며 틀림의 대상에 대해서는 불관용 원칙이 여지없이 적용된다. 이 같은 편가르기, 당파적인 특성 때문에 신앙은 사랑과 양립 불가능한 불관용을 그 속성으로 포함하고 있고 따라서 신앙과 사랑은 모순이라는 지적이다. 자유롭고 보편적인 사랑은 소심하고 제한된 성질의 신앙에 의해서 왜곡되고 축소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당파적 속성은 악마적이기도 한데 신앙인으로 일컬어지는 그들은 무신론자들이 사후 지옥에서 받을 고통을 생각하며 기쁨에 취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증오를 내포한 신앙을 두고 포이어바흐는 오히려 사랑과 반대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신앙은 사랑의 반대다...(중략)...그러므로 사랑은 오직 이성과 일치할 뿐이며 신앙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성과 꼭 같이 자유로우며 보편적인 성질을 지닌 반면 신앙은 소심하고 한정된 성질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성이 있는 곳에서만 일반적인 사랑이 지배한다. 이성 자체가 보편적인 사랑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기독교의 본질>, 403-404)

일반적인 사랑에 지배받지 않는 신앙은 사랑과 모순되는 저주와 증오를 내포하고 있다.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결국 신앙인은 신앙인만을 사랑할 수 있으며 비신앙인은 사랑해서는 안되는데 왜냐하면 신이 버리는 것을 인간이 취하거나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은 신에게 적대적이기에 신 앞에서 죄를 범하는 일이다. 신앙의 당파성에 감추어진 증오와 저주는 비신앙인들에 대한 광적인 폭력성으로 나타나기 마련인데 과거 십자군 전쟁이 그 좋은 사례 중 하나다. 영토 야욕을 채우려는 인간의 욕망이 신앙의 당파성과 맞물려 광적인 폭력을 부추긴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사랑과 모순되는 신앙의 당파성을 가리켜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적인 사랑은 기독교적인 것만을 사랑할 뿐"(<기독교의 본질>, 399)이라고 일갈한다. 이러한 신앙의 당파성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뿐이다. 아니 이마저도 신앙의 당파성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그것은 철저히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난 원한 관계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은 개인적인 적에 관계될 뿐이며 공적인 적, 곧 신의 적이나 신앙의 적인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연관되지 않는다. 인간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거부하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주와 신을 부정한다. 신앙은 인간 사이의 자연스러운 유대를 없애버린다. 신앙은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통일 대신에 특수한 통일을 설정한다."(<기독교의 본질>, 399)

이러한 당파성은 신앙을 도덕과의 관계에서 도덕과 동등한 위상으로 정립해 선과 악의 구도에서 신앙을 선과 결부시키도록 이끈다. 자연스럽게 믿으면 선이고 믿지 않으면 악이라는 도식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신앙은 믿는 자에게는 호의적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악의적이다. 또 믿는 자는 축복을 받고 신의 영원한 행복에 동참하나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고 신에게 버림을 받고 인간에게 배척 받는 수순을 밟는다. 이러한 신앙은 때때로 도덕 위에 서기도 한다. 즉, 도덕과의 동일화를 추구하면서도 도덕과의 모순도 불사하는데 가히 도덕 위에 군림한 신앙인 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도덕적 실천에 달려 있지 않고 신앙에 달려있다는 식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도덕적 의무가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 선으로서의 신앙 자체가 행복의 수호자라는 말이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종종 신앙 자체를 위해서 도적적 의무를 배제하고 도덕에 위배되는 나쁜 행동을 정당화시키기도 한다. 도덕이 신앙에 종속되고 신앙을 위해서 마땅히 희생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 현장에서는 도덕 소외 현상이 일어난지 오래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도덕적 의무를 배제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신자들은 물론이고 목회자들마저 도덕 불감증에 빠져 있는데 목회자의 성범죄나 횡령 사건 등의 문제는 비근한 예에 속한다. 이러한 도덕 경시 풍조는 도덕과 견줄 때 신앙이 우월하다는 의식에서 비롯되는데 신 자체가 유일선이기에 신앙 자체도 도덕 중의 도덕, 이른 바 최고선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의무나 실천에 있어서 신앙에 대해 면책 특권을 부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도덕주의로 삶을 옥죄는 것도 문제이지만 도덕을 초월한 신앙의 이름으로 일탈과 방종을 부추기는 것도 개인과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것은 매한가지다. 

"예컨대 도덕적으로는 나쁘지만 신앙이라는 측면에서 칭찬받을 만한 행위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위들은 신앙의 최선만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모든 행복이 신앙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다시 신앙의 행복에 달려 있다. 신앙이 위기에 직면하면 영원한 행복이나 신의 영광도 위기에 직면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신앙의 촉진을 목표로 하는 모든 것에 특권을 부여한다. 신앙은 엄격한 의미에서 인간 속의 유일한 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 자체가 유일하게 선한 본질, 최초의 최고의 계명 그러므로 바로 신앙인 것과 같다."(<기독교의 본질>, 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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