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성 아래 뙤리를 튼 교만한 신앙 주체에 대하여
지금까지 신앙의 당파적 속성으로 인해 도덕과 신앙의 모순을 포함해 신앙과 사랑의 모순이 빚어지고 있음을 살펴봤다. 도덕과의 관계에서 신앙의 당파성은 선악 구도를 형성해 믿으면 선이고 믿지 않으면 악으로 신앙인과 비신앙인을 구분 지었고 후자에 대한 배제와 증오를 정당화 했다. 이렇듯 당파성에 매몰되어 있는 신앙이었기 때문에 애당초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랑을 기대할 수 없었고 사랑 역시 당파적인 이해 관계에 따라 축소, 왜곡될 수밖에 없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대목에서 사랑해야 할 대상과 증오해야 할 대상을 나누게 하는 신앙이 내포한 증오와 저주의 출처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신앙인들은 왜 사랑의 행위에 있어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랑과 대립하는 편합하고 자기 모순적인 왜곡된 사랑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가? 포이어바흐는 그것이 신앙이 특수한 명예감과 자신감을 인간에게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신앙의 당파성 아래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거만함, 교만함이라는 지적이다. 교만한 신앙은 신앙과 비신앙의 다름을 틀림으로 읽어내고 비신앙을 배제하면서 자기 신앙의 우월감에 도취하도록 이끈다. 이러한 우월감에 젖어 있는 신앙인은 비신앙인이 자신을 우러러 보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지게 하는데 이는 비신앙인은 천하고 신앙인은 귀하다는 명제를 성립시킨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귀족이며 신앙이 없는 사람은 평민이다. 신은 신앙이 있는 사람이 신앙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 가지는 차이와 특권이 인격화된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스스로의 본질을 어떤 다른 본질로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명예를 자기 안에 직접 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격 안으로 밀어 넣는다. 신앙인의 특권의식은 이러한 다른 인격에 관한 의식이며 그는 자기자신에 대한 감정을 이 다른 인격성 안에 두고 있다."(<기독교의 본질>, 394)
신의 특권에 자기 명예욕을 투사한 결과 신앙인에게 특권의식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명예욕이 앞서 있었고 이러한 명예욕이 투사된 다른 인격으로서의 신에게 그 특권의식이 부여된 셈이다. 여기서의 신은 자기 명예욕을 투사한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를 신앙의 이름으로 가르고 비신앙인은 무로 신앙인은 유로 설정하고 인간을 하나씩 신앙인으로 동일화 해나가는 근거에도 이러한 특권의식, 즉 신앙의 교만이 자리잡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신앙인들이 사찰에 들어가 땅밟기 기도를 하는 등 타종교인들에 대해 배타적인 행위를 일삼는 것도 나아가 불상을 훼손하는 등 폭력적인 행위마저 서슴치 않는 것도 그 의식의 뿌리에 신앙의 특권의식, 신앙의 교만함이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신분적 위계질서 구조 안에서 신앙인들 입장에서 비신앙인들은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다만 구원을 받아야 할 천민, 즉 개종의 대상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신앙 안에서의 교만한 주체의 부상이다.
이러한 신앙의 당파성은 특히 '우상숭배 금지'라는 교리에 의해 특정 대상, 즉 비신앙인들에 대해 극단적인 배타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신앙의 배타성은 우상숭배자들이 지옥의 불쏘시개가 되어 활활 타기를 드러내놓고 기대하는 신앙인의 단면에서 격렬하게 표출된다. 이처럼 신앙은 내세를 요구하는데 그 주된 이유는 신앙인의 영원한 행복 보장 뿐만 아니라 비신앙인들을 위해 지옥 불이 활활 타올라야 하는 보다 직접적인 종교적 동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이 겉으로는 천국을 사모하나 실질적으로 그들을 기쁨에 취하게 하는 것은 비신앙인들을 위한 지옥의 존재라는 고발이다. 신앙인들에게 지옥은 그들의 기쁨을 더욱 감미롭게 해주는 신앙의 내용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얘기다.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신앙인들은 무신론자들이 사후 지옥에서 겪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상상하면서 쾌감을 맛본다.
신앙인의 특권의식에 기인한 배타성 그리고 당파성은 신앙인들이 은혜를 베풀거나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을 신앙이 있는 자들로 한정한다. 그들처럼 같은 신앙인들에 한해서만 편협한 "기독교적인 형제애"(<기독교의 본질>, 406)를 보여줄 뿐인 것이다. 이처럼 일반적인 사랑과 모순되는 기독교는 자기 모순을 불사하면서 신앙과 사랑을 양자택일 관계로 보지 않고 신앙인들에게 이 둘을 동시에 의무 지운다. 신앙과 사랑이 양자택일 관계였다면 사악한 악마종교가 되거나 아니면 아예 종교가 성립될 수 없기에 그랬던 것일까? 따라서 기독교에서는 이단자를 증오하는 행위가 종교에 부합하면서도 동시에 사랑에 모순되지 않는다. 심지어 비신앙인들에 대해 배타적이고 폭력적일수록 그들의 신앙심은 좋은 것으로 여겨진다. 신앙의 당파성에 결부된 "거짓 성스러운 사랑"이기에 그렇다.
"신앙과 결부된 사랑은 편협하고 잘못된 사랑이며 사랑의 개념, 곧 사랑 자체에 모순되는 사랑이며 거짓 성스러운 사랑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랑은 신앙의 증오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랑은 신앙이 손상 받지 않는 한에서만 착하다...(중략)...성경은 신앙을 통해서 저주하고 사랑을 통해서 용서한다. 그러나 성경은 신앙의 기초를 갖는 사랑만을 알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도 이미 저주하는 사랑이 나타나며 이 사랑은 잔인성으로 유지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나에게 주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사랑이다."(<기독교의 본질>, 414-415)
신앙은 정죄이고 사랑은 용서이고 위로인데 신앙의 당파성과 결부된 사랑은 신앙에 종속된 특수한 형태의 사랑에 불과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신앙과 결부된 사랑은 잘못된 사랑이며 사랑 자체에 모순되는 사랑이고 거짓 성스러운 사랑이며 이기적인 사랑으로 전락해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경고다. 포이어바흐는 사랑의 보편적 본질로의 해방을 위해 사랑과 모순되는 신앙이라면 차라리 과감히 신앙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편다. 기독교적 사랑이 기독교성을 포기해 사랑을 최상의 법칙으로 삼지 않는 한 기독교적 사랑은 진리의 의미를 모독하는 편협한 사랑으로 남을 뿐이라는 얘기다. 신앙에서 벗어난 이른 바, 사랑의 비종교화을 선언한 것이다. 참되고 진실한 사랑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서 인간 소외와 억압을 초래하는 자가당착적인 신앙의 환상을 파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종교와 자각적 이성과의 관계에서는 하나의 환상을 파괴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환상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에게 근본적으로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며 인간에게서 실제 생활의 힘을 없애며 진리와 덕에 대한 감각을 말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체로 가장 내적이고 진실한 심성인 사랑까지도 종교성을 통하여 가상적이고 환상적인 사랑이 되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사랑은 단지 신을 위하여 사랑하는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겉으로만 인간을 사랑할 뿐이고 실제로는 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기독교의 본질>, 427)
포이어바흐의 투사론에 입각해 풀어보면 결국 종교성을 통해 드러나는 사랑은 가상적이고 환상적인 사랑에 불과한데 그러한 사랑의 대상은 주체 내재적 대상화의 과정을 거친 자기애가 투사된 신이라는 얘기다. 타자와의 쌍방적인 관계를 본질로 하는 진실한 사랑은 자기와의 일방적 관계에서 자기만을 사랑하는 가상적이고 환상적인 사랑으로 전락해 버린다. 종교성을 통과한 사랑은 이처럼 타자를 사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도취로 빠지게 한다는 것이 포이어바흐의 일관된 주장이다. 신이 인간의 자기 대상화로 나타난 다른 인격이라면 결국 자기만을 사랑하며 자기만을 숭배하는 격이니 자아도취적 우상숭배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종교적 환상 파괴이자 우상파괴의 실마리로서 종교성의 매개를 거부하는 사랑의 비종교성이 갖는 의미는 포이어바흐에게 실로 각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