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와 묵상] 두터운 스웨터

이인기 목사(반포소망교회)

두터운 스웨터 

                                                                                                                                                   문태준

엄마는 엄마가 입던 스웨터를 풀어

누나와 내가 입을 옷을 짜네

나는 실패에 실을 감는 것을 보았네

나는 실패에서 실을 풀어내는 것을 보았네

엄마의 스웨터는 얼마나 크고 두터운지

풀어도 풀어도 그 끝이 없네 엄마는

엄마가 입던 스웨터를 풀어 누나와

나의 옷을 여러 날에 걸쳐 짜네

봄까지 엄마는 엄마의 가슴을 헐어

누나와 나의 따스한 가슴을 짜네

시인(1970- )은 엄마의 사랑의 속성을 그녀가 스웨터를 풀어 새 옷을 짜는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속성이므로 상황과 조건이 달라져도 그 사랑은 변하지 않는 특질을 보여준다. 그 특질은 무엇일까? 첫째는, "얼마나 크고 두터운지" 모른다. 둘째는, 형체가 없어질 수 있다. 셋째는, 엄마의 스웨터가 누나와 나의 옷이 되듯이 새롭게 태어난다. 이런 특질은 생명의 속성과도 통한다. 생명은 그 존재의 연원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크고 두[텁다]." 죽음으로써 비로소 해체된다. 그리고 다른 생명을 태어나게 하거나 스스로 다른 형체로 변한다. 이처럼 사랑과 생명이 상통하는데, 궁극적으로는 "따스한 가슴"을 공통적으로 연상시킨다. 엄마의 사랑은 그 "따스한 가슴"에 생명의 속성을 담고 있다.

시인은 어린 시절 엄마의 모습을 회상한다. "엄마는 엄마가 입던 스웨터를 풀어 누나와 내가 입을 옷을 짜네." 엄마는 입고 있던 스웨터가 싫증이 난 것이 아니었다. 스웨터이니 겨울의 한기를 막기 위해 엄마에게 필요했지만, 그보다는 자식이 한기를 느끼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필요가 앞섰다. 시는 엄마의 행위를 희생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엄마가 그것을 희생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희생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위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행위인데, 옷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보면, "엄마가 입던 스웨터"를 푸는 것은 자식을 위해 자기 개인의 정체성을 해체하는 것과 같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갖는 개별적인 정체성을 자식을 위해 희생할 때 엄마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시인은 그렇게 표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한 여성을 엄마라고 부르고 그녀가 자기의 옷을 자식을 위해 풀기 때문에 그는 엄마의 정체성이 희생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제 엄마가 입던 스웨터는 형체가 없어졌다. "나는 실패에 실을 감는 것을 보았네." 엄마가 입던 스웨터는 해체되었고 실패의 형태로 수습되었다. 옷을 풀며 끊어진 실들을 잇는 등의 과정이 쉽지는 않은데, 실패에 감긴 실에서는 어디에서고 스웨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존재가 소멸된 것이다. 나는 그 의미를 깨쳐서 말로 표현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엄마가 자기를 해체하면서도 그 행위의 의미에 대해 침묵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를 해체하면서 그것을 희생이라 지칭하거나 숭고한 사랑으로 치장하지 않았다. 다만 침묵 속에서 새로운 형체를 형성하기 위한 준비에 몰입할 따름이었다.

준비를 마친 뒤 엄마는 지체하지 않았다. 그녀는 목적의식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실패에서 실을 풀어내는 것을 보았네." 그녀는 정체성을 잃었다고 자포자기하거나 그 정체성을 되찾고자 도모하지 않고 오로지 자식을 자기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삼았다. 물론, 그것이 자식에게 그녀의 인생을 맡기는 것처럼 보여서 어리석은 결정으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 비판조차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의 스웨터는 얼마나 크고 두터운지 풀어도 풀어도 그 끝이 없네." 실패에 감긴 스웨터의 실을 풀어 옷을 짜는 것은 자기의 정체성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어떤 이유에서든 그 과정을 중도에 멈추지 않는다. "풀어도 풀어도 그 끝이 없[어]" 보이는 이유는 그녀의 스웨터가 누나와 나의 스웨터로 온전히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한성은 그녀가 결국 목적을 이룰 것임을 암시한다. 그 무한성을 확인하게 하려는 형식적 배려로서 시인은 시문이 휴지(休止)나 단속의 구두점 없이 이어지게 했다.

실이 끝없이 풀려나오기 때문에 새 옷을 만드는 과정에는 시간이 소요된다. "엄마는 엄마가 입던 스웨터를 풀어 누나와 나의 옷을 여러 날에 걸쳐 짜네." "여러 날"은 단순히 시간뿐만 아니라 인내와 집중작업도 필요함을 알린다. 이 지점에서 누나와 나의 옷 중 어느 것을 먼저 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나와 나는 동일한 자식이며 새롭게 만들어가는 하나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옷이 짜지면서 엄마로서의 정체성도 구성되는데, 이는 그녀의 옷을 입은 자식의 삶 속에 그녀가 살게 됨을 알린다. 그렇게 새 옷을 짜는 데 소요되는 여러 날은 "봄까지" 이어진다. 봄은 생성의 계절이므로 엄마의 새로운 정체성이 형성될 것임을 예고한다. 그러나 봄까지 짰으니까 정작 스웨터가 필요한 한겨울에는 누나와 나는 그 옷을 입지 못했다. 물론, 엄마도 추위를 견뎌야 했다. 그녀의 희생이 소용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정체성이 완성되는 시기는 계절의 변화나 상황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한겨울의 시급한 필요까지도 넘어서며 목적을 이루려는 인내가 결정한다.

왜냐하면, "봄까지 엄마는 엄마의 가슴을 헐어 누나와 나의 따스한 가슴을 짜[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식의 정체성으로 변화되는 일은 가슴의 일이다. 시간과 효용성보다는 "따스한 가슴"의 문제이다. 한겨울 동안 그녀의 가슴을 헐어 누나와 나의 가슴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의 생명을 불쏘시개로 써서 자식의 가슴을 따스하게 데운 것이다. 그 따스함은 실존적 결단이 만들어낸 생명의 온기이다. 그 따스함이 "얼마나 크고 두터운지" 그 순간에 알 법하다. 그러나 사실은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생명을 소진하고 그만큼 그 일에 집중하는 상황의 깊이를 어느 누가 가늠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엄마의 사랑이다.

엄마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대변한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는 사실상 서늘한 가슴을 안고 살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우주적 계명 아래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서 내세에 대한 희망도 없이 정욕과 탐심을 좇으며 죽음을 향해 달려갔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가슴을 헐어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삼으셨다. 자기의 생명을 바쳐 우리의 "따스한 가슴"을 짜신 것이다.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6-8). 이 사랑이 엄마를 통해 그대로 드러났으니까 그 사랑은 생명만큼 심원하고, 희생으로써 그 가치를 증명하며,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져서 가슴을 따스하게 한다. 이로 보건대, 그녀는 하나님이 모든 곳에 계실 수 없기에 대신 보내신 대사이다. 하나님은 영이어서 육신의 형체로 이 땅에 기거하지 못하시므로 사랑의 대사를 보내어 우리의 "따스한 가슴을 짜네." 그 가슴 안에 엄마가 산다.

※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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