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 박사 |
안식일 다음날, 부활한 예수는 유대인들이 무서워 꼭꼭 숨어 있던 제자들 앞에 나타난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아직 믿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었다. 이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난 못 자국으로, 사흘 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상처가 아물었을 리 만무다. 그는 ‘샬롬’이라고 평화를 비는 인사를 건넨 후에 숨을 내쉬면서 그들에게 성령을 내어준다. 그러나 예수가 제자들에게 다녀간 후 마침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는 동료 제자들의 이야기를 전혀 믿지 못한다. 그는 오히려 동료들을 비웃듯이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한다.
여드레 뒤에 이번에는 토마까지 있을 때에 예수는 다시 한 번 나타나 마치 토마가 한 말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고 말씀하신다. 토마는 예수 앞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말을 하여 자신의 의심을 떨쳐버린다. 발현사화의 전개를 따라가 보면, 반전反轉을 염두에 둔 재미있는 이야기 형식을 빌려 왔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 발현사화 덕분에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토마는 ‘의심 많은 토마’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증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토마의 태도가 합리적이었던 점만은 분명하다.
‘의심 많은 토마’ 이야기는 예수 부활에 대한 그 많고 많은 발현사화들 중에서도 독특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바로 토마라는 매개 인물이 그 열쇠를 쥐고 있다. 예수는 토마가 없을 때 제자들 앞에 나타나 자신이 육으로 부활한 모습을 보여준다(손과 옆구리의 못 자국, 숨을 내쉬며...). 그러나 마침 자리에 없었던 토마는 이를 믿지 않았기에 (예수 입장에서 보면 수고스럽게도) 한 번 더 나타나 손가락을 사용해 몸이 부활하였음을 확인시키려 한다. 이를테면 두 번에 걸쳐 확인했으니, ‘이 정도라면 육의 부활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라는 논리가 포함된다.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가졌던 육의 부활이 그처럼 중요하게 다루어졌을까?
요한복음은 대략 1 세기 말경 아시아 지방(에페소?)에서 씌어졌으며, 헬레니즘 세계를 주변 환경으로 삼고 있었다. 당시 헬라 세계에는 신과 인간의 세계는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 사상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신적인 존재가 육적인 존재인 인간이 될 수 있으며, 또한 그가 한번 죽었으면 죽었지 다시 육으로 부활할 수 있는가? 헬라 세계라는 문화 환경에서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질문들이었다. 따라서 이런 사상에 영향을 받은 1 세기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에서 사셨던 예수는 그저 꼭두각시 환각 작용에 불과할 뿐이고 모든 일을 하느님 손수 이루어냈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러니 예수의 부활도 자연히 사실성보다는 그 의미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던 것이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나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예수는 하느님께서 시뮬레이션 기법으로 창조해낸 가상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반대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틀림없는 육적인 존재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끝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선재先在한 로고스가 강생하였다는 ‘로고스 찬가’(1,1-18)가 그렇고, 부활한 예수가 시장기를 느껴 제자들과 함께 물고기를 구워 먹음 이야기가 그렇다(21,1-14). ‘의심 많은 토마’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예수가 육적인 존재였음을 증명하는 대열에 당당히 끼게 되었다. 토마의 의심이 육적인 예수 부활의 실증을 이끌어 낸 것이다.
박태식 박사(서강대, 가톨릭대, 성공회대 신학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