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의 나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그가 나그네 생활을 시작한지 24년이 지났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17:1) 엘 샤다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람들을 예속에서 해방하시는 분인 동시에, 가물거리는 생명의 심지에 불을 붙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순종과 흠없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나에게 순종하며"라는 구절을 영어 성경은 대개 'walk before me'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소속의 문제입니다. 그가 우리의 내(內)집단에 속한 사람인지 아닌지가 모든 판단의 기준입니다. 하지만 주님에게 중요한 것은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다면 그건 좋은 일입니다. 생명이 회복되고 온전해진다면 그게 누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아주 배타적이고 편협한 이들이 많습니다."
에덴동산에는 두 개의 중요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그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금지하시며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와 아담은 그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선과 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들에게는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죽옷을 해 입히시고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십니다. 그들을 내보내시기로 결정하신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그 가운데 또 하나의 중요한 나무가 등장합니다.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22절)
"에덴동산에서 숨바꼭질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술래이고 아담과 하와가 숨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 숨바꼭질은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 심각한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짓고 숨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지은 죄는 에덴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것입니다."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야말로 주님께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정의만 외치면서 정작 사랑을 잃어버리거나, 사랑을 말하면서 정의를 소홀히 하는 것은 다 잘못입니다. 이스라엘의 전도자는 말합니다.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아라. 왜 스스로를 망치려 하는가?"(전7:16) 그러면서 그는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전7:18)고 말합니다. 이건 어중간한 중간을 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
"나의 자유로운 행동이 누군가에게 걸림돌로 작용한다면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타자를 위한 존재로 부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람들이 나치즘에 동조했던 까닭을 분석하면서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을 썼습니다. 산업화를 통해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전통적인 권위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종교나 관습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말입니다."
"평화는 곧 안식의 세계입니다. 평화는 어디에서 비롯됩니까? 평화라는 단어 속에 그 답이 있습니다. 평화는 고르다, 평평하다는 뜻의 平과 화하다, 응하다는 뜻의 和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화' 자는 또한 벼 禾 자와 입 口 자가 결합된 것입니다. 밥을 나누어 먹는 것이 곧 평화의 시작입니다. 누군가 밥을 독점할 때 평화는 깨집니다.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 혹은 불화가 아니라 독점입니다. 내 배 만 채우는 것 말입니다."
"어느 날 갈릴리 나사렛에 머물고 계시던 예수님이 요단 강에 오셔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는 '죄의 용서' 혹은 '씻음'을 뜻하는 것이기에, 죄 없으신 주님이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이 낯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통해 모든 인간의 운명 속에 뛰어 드셨습니다. 우리와 다른 자리에 서서 우리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신 것이 아니라, 喜怒哀樂愛惡慾 속에서 복닥거리는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 풍덩 뛰어들어 우리와 함께 울고 웃으시면서, 더 높고 깊은 세계를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넘어지는 사람을 붙들어 주십니다. 짓눌린 사람의 살 권리를 되찾아 주십니다. 살기 위해 모욕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을 짓밟는 이들에 맞서십니다. 잠언의 지혜자는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잠17:5)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의로우심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지켜 주시며, 악한 사람은 누구든지 다 멸하신다"(20). 하나님을 경외하는 시인의 확신입니다."
유엔총회는 2017년 12월21일(현지시간) 용기 있고 올바른 역사적 결정으로서 "예루살렘 결의안'을 가결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수도'라는 미국내 정치적 목적에서 출발한 일방적 선언을, 유엔이라는 인류양심의 힘으로 부결시킴으로서 유엔정신에 입각한 '예루살렘 결의안'을 찬성 128, 반대 9, 기권31의 표결결과로서 가결한 것이다.
신정론에 관한 유명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악도 만드셨는가라는 질문에 소년 아인슈타인의 답변을 교수와의 질문과 대답에서 구성한 내용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악의 실체를 부정하며 악이란 선의 부재를 뜻한다고 설파하였는데 소년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의 차원에서 이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 오시는 주님은 이미 익숙해진 우리 삶에 균열을 내고, 우리의 자아와 자기중심성을 깨뜨립니다. 주님을 모신다는 것은 바로 그런 가능성 앞에 서는 일입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도시인들은 웬만하면 자기 집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지 않습니다. 자기 사생활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익숙해진 삶(routine)에 누가 틈입하는 것을 허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말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까?"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이지만 옛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기 직전의 시간은 혼란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의롭고 바르게 살려는 이들이 큰 어려움을 겪곤 합니다. 견디기 어려운 박해가 닥쳐오기도 합니다. 묵시문학은 바로 그 상황에서 탄생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사는 사람은 그 시련의 시간이 잉태하고 있는 새로운 역사를 내다봅니다. 저는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문명의 기운이 태동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 사람은 특정한 인종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고대 근동 세계를 떠돌던 날품팔이 노동자들과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문명의 중심에서 밀려나 소모품처럼 취급되고 있던 이들을 보호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스러웠던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다른 이들을 보살피고 돌보라는 소명까지 주셨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특정한 지역만 다스리는 지역신이 아닙니다."
지난 15일 경북 포항에서 발생한 규모 5.4의 지진으로 부상을 당한 모든 분들의 조속한 쾌유와 피해를 입은 포항시민 모두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린다. 이번 지진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지만 그 충격에 비해 경미한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은 천만 다행이다.
[향린교회 한문덕 목사 설교] "넉넉한 만남""존경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참으로 반갑습니다. 2014년 4월 27일 설교를 마지막으로 향린교회의 부목사직을 사임하고, 10년 6개월 만에 여러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