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김천 황금정교회에서의 행복한 목회

    김천 황금정교회에서의 행복한 목회

    부산의 도시빈민선교사업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막을 내렸고, 서울에서 조선신학교 일을 볼 수도 없게 된 송창근은 1940년 초에 경북의 김천으로 옮겨갔다. 김천 황금정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이다. 김천은 경북의 한 중소도시이다. 옛날에 금이 나는 샘인 금지천(金之泉)이 있는 땅이라 해…
  • 조선신학교 설립

    조선신학교 설립

    송창근이 충옥하고 보니 그간 시국은 더욱 많이 악화되어 있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성빈학사’는 완전히 문을 닫고 뿔뿔이 흩어져 버려서 도저히 되돌릴 수가 없는 상태였다. 나빠진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조선총독부에 의한 집요하고 잔혹한 신사참배 강요에 조선 천지가 굴복했다. 마지막…
  • 수양동우회 사건

    수양동우회 사건

    1937년 10월 28일 송창근 목사는 돌연 부산에서 체포되었다. 그가 부산에 내려가서 도시빈민선교사업을 시작한 지 2년째인 때였다. 그의 피체와 관련해서 당시 에는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지난 십일 오전 열시 경에 북부산경찰서 고등 형사대가 부내 초장정에 있는 성빈학사 장 신학박사 송창근 씨를 검…
  • 부산에 세운 성빈학사

    부산에 세운 성빈학사

    부산은 송창근에게 새로운 선교사업을 시작할 새로운 땅이었다. 새로운 각오를 지니고 그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1936년 4월 바닷바람이 싱그러운 부산에 도착한 송창근은 이내 평양에서 생각하고 계획했던 선교의 방향을 바꾸었다. 부산 나병원의 울타리 안에서 그 곳에 수용되어 있는 나환자들을 위해…
  • 산정현교회를 떠나 부산 나병원으로

    산정현교회를 떠나 부산 나병원으로

    송창근 목사의 지도 아래 산정현교회는 날이 갈수록 부흥했다. 교인 수가 많이 늘어서 교회 건물이 비좁아졌다. 교회 건물은 한식으로 건물 내부에 여기저기 기둥이 박혀 있어서 1935년 여름 교회 신축 문제가 대두됐다. 이는 전 교인이 모두 동의하고 있었다.
  •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하다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하다

    송창근 목사가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것은 1932년 4월 상순이었다. 산정현교회는 일명 산정재교회라고도 불렸다. 현(峴)은 고개를 말하는 것이라서, 고개 ‘재’ 자를 넣어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산정현교회는 장대현교회에서 분립한 교회다. 장대현교회의 교인들이 늘어나면서 1903년 남문외교회가 분립…
  • 만우 송창근 6년만의 귀국

    만우 송창근 6년만의 귀국

    송창근이 뉴저지 주의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로 전학해 간 것은 1928년 9월 초였다. 1928년 가을 학기부터 피츠버그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피츠버그 시는 역사가 오랜 도시였다. 시의 이름은 식민지 시대에 영국 수상이었던 윌리엄 피트의 이름을 따서 지어…
  • 프린스톤 신학교로 전입

    프린스톤 신학교로 전입

    1927년 9월, 송창근은 11개월 간의 캘리포니아 주의 샌프란시스코 생활을 마감했다. 그가 “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활”을 한 그 곳을 떠나서 뉴저지 주의 프린스톤으로 간 것은 ‘1927년 9월 하순’이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미주 대륙을 횡단하여 프린스톤으로 향했다. 프린스톤 신학교와 정…
  • 아! 샌프란시스코

    아! 샌프란시스코

    1922년 여름방학의 전국 순회 대강연 여행을 마친 뒤, 송창근은 동경으로 귀환하여 동양대학 문화학과에 계속 다녔다. 그러다가 1924년 봄 학기에 신호(神戶:고베) 신학교에 편입하여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후 1924년 가을 학기에 청산학원 신학부 전문부(3년제)의 2학년으로 편입했다. 청…
  • 일본 동양대학 유학시절과 한국 순회 전도 강연

    일본 동양대학 유학시절과 한국 순회 전도 강연

    김재준과의 만남에서 보았듯, ‘인재 발굴하여 키우기’는 송창근이 지난 특성 중 하나였다. 그런데 송창근이 그 못지않게 마음을 쏟아 노력한 것이 ‘자신을 키우기’였다. 남대문교회 전도사 노릇을 하던 송창근은 아직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서울에서 손꼽히는 큰 교회의 전도사가 된 것으로 만족…
  • 송창근의 호 만우(晩雨) 또는 시온성(時蘊城)

    송창근의 호 만우(晩雨) 또는 시온성(時蘊城)

    송창근은 23세 이전에 이미 자신의 호를 지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만우(晩雨)’ 이하자면, ‘늦은 비’라고 표기되는 아주 운치 있는 호였다. 그는 1921년 5월에 발표한 자신의생애 첫 논설의 필자명을 ‘송만우(宋晩雨)’라고 표기할 만큼, 그는 자신의 호에 대해서 큰 자긍심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
  • 청년 김재준과 송창근의 역사적인 첫 만남

    청년 김재준과 송창근의 역사적인 첫 만남

    송창근이 1919년 3월에 피어선 성격학원을 졸업했을 때, 마침 남대문교회의 조사(전도사)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조사였던 함태영 씨가 3.1 만세 사건으로 수감됨으로써 그 자리가 빈 것이다. 그런데 송창근이 그 자리에 발탁되었다.
  • 영국교회 쇠퇴가 한국교회에 주는 시사점은

    보통의 한국 사람은 영국을 기독교적 문화와 유산, 전통을 가진 나라로, 한 때는 세계를 지배했던 영광의 역사를 가진 나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한국인들이 현재도 선진문화 습득과 교육을 위해 영국으로 떠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해본다. …
  • 통일한국의 미래, 탈북자 선교는 왜 중요한가?

    미래 한국은 그것이 언제 어떠한 과정을 거치든지 ‘통일 한국’의 형태가 될 것이다.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독일 통일 사례보다는 더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치겠지만 미래 한국은 통일 한국의 방향으로 갈 것임을 많은 전문가들은 예측한다. 쉬운 예로 2020년의 미래 한국을 볼 때…
  • 명민하고 활달하고 대담한 소년

    명민하고 활달하고 대담한 소년

    1898년 한 해 내내 세상이 몹시 시끄러웠다.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벌였고, 쿠바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고, 미국은 필리핀과 괌과 푸에르토리코를 획득하고 하와이를 병합했다. 서구 열강은 ‘병든 거인’으로 불린 청나라를 삼키기에 혈안이 되어 독일은 교주만을 조차했고, 러시아는 여순과 대련을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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