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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비판에서 신앙성찰로(14):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적 통찰을 중심으로
글 · 파울로 연세대학교 신학박사(Ph. D.)

입력 Jun 23, 2022 08:21 PM KST

인격주의와 신의 무인격성에 대하여

인격이 문제가 아니라 인격주의가 문제다. 신을 지나치게 인격적으로 환원시킨 인격주의적 신관은 의인화의 산물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도덕이 문제가 아니라 삶을 옥죄고 억압하는 도덕주의가 문제이듯이 신의 인격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배려하는 방식으로만 신을 작동시키려 하는 인격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인격주의적 신관은 인간의 자기 투영의 결과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인격주의적 신관의 이러한 환원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적 신관의 모색이 필요한 지점이다.

신이 인간을 배려하는 방식으로만 일한다는 것은 전형적인 인간의 자기중심적 관점의 반영이다. 이는 앎에서는 아귀가 맞는 주장이지만 모순과 부조리의 총체인 삶에서는 아귀가 잘 맞아 떨어지지 않는 이야기다. 무슨 말인가? 신이 나를 배려하는 방식으로만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부딪히고 갈등하는 삶의 현실에서 몸소 겪게 된다는 것이다. 삶은 '때문에'로 일컬어지는 죄와 벌이라는 조건과 '위하여'로 일컬어지는 수단과 목적이라는 조건으로 구성된 '앎'의 파편 따위에 부합하지 않는 그야말로 날 것으로서 체험된다.

도덕적 세계관에는 구멍이 뚫려서 악인은 잘먹고 잘살고 의인은 고난받는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일찍이 전도서 기자는 모순적 격동의 총체인 삶의 부조리 앞에서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절규하기까지 않았는가. 앎의 조건, 즉 인과율과 목적론을 수반하는 인격주의적 신관은 이러한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없고 다만 정죄에 의한 억압과 환상을 통한 기만으로 작용할 뿐이다. 삶에서 인격성과 부합하지 않는 자연의 속성, 즉 맹목적 필연성과 비정함이 고개를 들 때마다 인격주의적 신관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인격성의 반대항에 위치한 무인격성을 붙들어야 마땅하다.

인격주의적 신관의 파괴는 자연의 무인격성에 대한 수용에서 가능하며 이는 현대인들에게 맞갖은 신관을 되살려 낼 수 있는 가능조건이기도 하다. 현대인은 이른 바, 무신성(Gottlosigkeit)의 시대를 살고 있다. 신부재 체험을 일컫는데 이는 자연의 무인격성과 겹쳐진다. 앎의 조건에 얽매이지 않은 자연은 맹목적 필연성이며 은폐성(침묵)으로 읽혀진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삶의 부조리 앞에서는 침묵하신다. 인간 뿐 아니라 아니 인간 보다 먼저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단지 인격성만 지니고 있다고 우기며 신의 인격성만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인간의 자아도취적 우상숭배로 귀결될 뿐이다. 인격성에 하나님을 가둘 것이 아니라 그 인격성으로부터 자유하신 하나님의 무인격성으로 눈을 돌려야 하는 까닭은 이것이 인간의 자기 우상파괴를 통한 해방과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중심적 관점으로 신과 세계를 보듯이 자연에도 마찬가지로 인간중심적 관점을 적용시켜 자연에 인격성을 부여하는데 이것이 자가당착일 수밖에 없는 것은 자연 자체가 인격성과는 거리가 먼 무인격성을 속성으로 하기에 아귀가 잘 맞아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이 인간을 배려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만에 하나 배려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한들 인간 소외와 억압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다. 인격화된 자연 앞에, 다시 말해 도덕주의적 자연 앞에 뭇 사람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도덕주의적 자기강박에 시달리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도덕적 질서에 사로잡힌 자연은 설혹 의인이 낭떠러지에서 수직 낙하해도 이를 안전하게 받아내는 자연이라야 하며 반대로 악인이 평탄한 길을 잘 걷고 있으면 기어이 코를 깨트려 벌을 주는 자연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인격적이며 기계론적인 세계 속에서 자연이 인간을 배려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경험이 누적되면서 허무주의와 이를 근거로 하는 현대 무신론이 고개를 들었지만 그리스도교는 이를 고전적인 무신론의 도전으로 오해하고 배척하기에 바빴다. 현대 무신론의 서막을 알린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이 배척 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 부재 체험 속에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의 '앎'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를 향한 포이어바흐, 니체, 프로이트 등 의심의 대가들의 예언자적 외침을 배척했다. 그리스도교는 신 부재 체험에서의 절규를 신의 존재 유무, 즉 '있음'의 차원에서의 고전적 무신론으로 받아들여 대화의 빗장을 걸어잠금으로써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퇴행하는 길을 걸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인간의 "무한한 의식의 자기 대상화"라는 신관의 투사의 불가피성을 감안할 때 신관과 인간의 자기 이해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상화된 신관의 파괴는 인간의 우상화된 자기중심성의 파괴, 곧 자기 비움과 맞닿을 수밖에 없다. 이는 포이어바흐가 지적했듯이 "비기독교적인 민족의 신앙에 들어 있는 먼지들만을 바라보고 스스로의 신앙에 들어 있는 대들보를 바로보지 않으려는"(<기독교의 본질>, 398) 교만한 신앙 주체에서는 불가능하다.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와 자아도취로부터의 해방은 자기 안에 이미 들이닥쳐 있는 모름을 수용하는 자기 비움으로만 가능하며 이 자기 비움이야말로 '앎'으로만 가득차 있는 자기라는 우상의 파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자기 비움은 인간의 자기중심성의 토대인 인격성마저 내려놓을 것을 요구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모름과 신비의 수용이며 자연의 무인격성 수용이라고 하겠다. '앎'의 확신에 차 있는 교만한 주체로부터 모름을 알고 모름을 수용하는 겸허한 주체로의 전환에서 비로소 우상파괴의 길이 열린다.

사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신의 무인격성을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다만 신의 무인격성이 드러날 때마다 아전인수격 해석을 불사하며 애써 의미를 부여하고 신의 무인격성마저 인격적으로 환원시키는 '앎'의 확신 강박으로 이를 제어하고 통제하며 길들이려 했을 뿐이다. 신에 대한 모름, 즉 신의 무인격성에 대한 '앎'의 횡포로 왜곡된 신 그림이 그려져 왔다는 것은 종교의 질곡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앎'의 틀, 조건에 맞아 떨어지지 않은 삶의 모순, 부조리 앞에 절규 안해본 사람이 있는가? 신의 은폐성, 그 비정한 신의 침묵 앞에 목놓아 울어본 사람들은 또 없는가? 원인을 따지는 인과율과 선한 목적을 지향하는 목적론의 인간중심적 '앎'의 틀에 포착되지 않는 신의 속성을 통칭해서 신의 무인격성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자기 비움은 결국 '앎'의 조건을 형성하는 '때문에'와 '위하여'를 넘어설 것을 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건에 얽매인 신인 관계에서 신은 인간에게 형벌의 합리화가 수반하는 정죄로 또 위로 뒤에 찾아오는 기만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앎'의 조건의 파괴가 우상파괴요 자기 비움의 실천인 것이다. 이러한 자기 비움의 실천을 통해서 우리의 '앎'이 아닌 '삶' 속에서 무조건적인 은총의 터전을 일구어갈 수 있다. '앎'의 조건을 철폐한 은총의 터전 위에서 비로소 인간을 배려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하지 않는 신의 무인격성이 절대적으로 수용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이처럼 신에 대한 모름을 수용하며 다른 한편으로 '앎'의 조건을 파괴하는 자기 비움의 실천은 인격성으로만 똘똘 뭉친 인격주의적 신관을 넘어서 인격성 뿐만 아니라 무인격성도 지니고 있어 양자가 팽팽한 긴장을 이루는 비환원주의적인 통전적 신관의 모색이 가능하도록 우리를 견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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