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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비판에서 신앙성찰로(15):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적 통찰을 중심으로
글 · 파울로 연세대학교 신학박사(Ph. D.)

입력 Oct 14, 2022 06:02 PM KST

6.2 신앙 위에 군림하는 이념주의 극복

한국교회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특정 이념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신앙을 이념에 복속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는 강단이 특정 이념에 대한 선전, 선동의 장으로 전락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 이념이 신앙의 좋고 나쁨을 가르는 기준으로 내세워지기까지 한다. 신앙의 이념화 정도가 아니다. 신앙을 특정 이념으로 도치시켜 이념을 우상숭배 하기까지 한다. 자신의 정치적 확신을 특정 이념에 투사해 이를 절대화 시키고 있다는 얘기다. 신앙 위에 이념이 군림하는 이념의 절대화, 우상화가 문제인 것은 스스로 이념이란 우상의 노예가 되어 다른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하고 이를 배척하는 등 독단에 빠지게 하는 데 있다.

이념이 문제가 아니라 이념주의가 문제다. 특정 이념으로의 환원을 가리키는 이념주의에서는 같음이 옳음으로, 또 다름은 틀림으로 간주되는데 이는 이념주의에 똬리를 틀고 있는 동일성 강박에 기인한다. 사실 이념주의는 좌우 가릴 것 없이 이러한 동일성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이는 '같음'이라는 자기 확인 과정을 통해 동일한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정체성 확립에 장애가 되는 '다름'이 '틀림'으로 읽혀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일성 서사에 걸림돌이 되는 '다름'은 마주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이처럼 이념주의는 동일성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이념주의 자체를 가리켜 동일성 이데올로기라고 통칭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동일성 이데올로기는 타자의 다름을 수용하지 못하고 옳고 그름의 잣대로 자기 동일성을 내세워 타자의 다름을 틀렸다고 배제하고 폭력을 가함으로써 자기의 동일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화에 빠져 있다. 이것은 특히 타자에 대해서는 억압으로 나타나는 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소외로 이어지기에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앎이 그려내는 자기 동일성이란 틀로 삶을 마음대로 주무르려 하는 것이 애당초 자가당착인 것은 그것이 범주 오류이기 때문이다. 삶은 자기 동일성이라는 '앎'의 틀에 포착될 수 없는 더 큰 범주이기에 그렇다. 일렁이는 다름의 총체로 엮어진 삶을 자기 동일성이란 '같음'의 틀에 끼워 맞춰 재단하려 하다보니 삶의 왜곡이 발생할 수 밖에 없고 자기 소외를 일으키게 된다. 자기 동일성 이념이라는 '앎'의 기만에 의해 남도 속이고 자기도 속고 있는 셈이다.

이념주의는 앞서 언급했듯이 자기에게는 강박으로 작용하며 타자에게는 독단으로 나타난다. 광화문의 태극기 부대 세력은 그 좋은 예다. 신앙과 이념을 도치시킨 그들은 자신들의 이념에 반하는 이들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죄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데 그야말로 이념에 종속되어 이념의 지배를 받는 이념의 노예가 되어버린 경우다. 자기들이 마치 이념을 소유하고 있는 줄 알지만 되려 이념이 그들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이념주의는 자기에게는 강박이지만 타자에게는 다른 이념, 다른 신앙을 부정하게 하는 독단적 태도로 나타난다. 타자의 다른 이념은 틀렸고 자기의 이념만, 아니 자기의 신앙만 옳다는 식이다.

또 다른 한편 같은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사랑하며 그것에 빠지는 것이 위험한 것은 그러한 자기 동일성 이념이 확증편향을 부추겨 세계의 주변에 불과한 자신을 중심으로 착각하게 하고 자기 안에서만 맴돌게 하기 때문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 등에서 작동되는 알고리즘 기능이 이러한 동일성 이념에 편승해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확증편향을 심화시키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름과의 소통을 위한 플랫폼이 정작 다름과의 소통을 방해하는 결과를 빚어내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같은 것이 좋고 같은 것이 옳다는 독단에 빠진 이념주의는 엄연한 다름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여 타자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자기가 구축한 가상 현실의 늪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이처럼 특정 이념을 구실로 타자를 수용하지 않는 것이 자가당착인 것은 이념에 앞서 타자와 얽힌 우리 삶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름의 향연이라 할 수 있는 삶의 애매모호함과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 동일성과 확실성을 보장해 줄 것 같은 앎의 마력에 이끌려 그 순서가 뒤집힌 것 뿐이다. 삶이 먼저 있었고 삶의 요구에 의해서 이념(앎)이 만들어졌다. 예측 불가능한 삶에 던져진 인간이 불안을 극복하려는 부단한 노력의 과정 속에서 나름의 이상사회를 꿈꾸게 되었고 그러한 '있음'이란 유토피아적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한 것이 '앎'이라는 이념 체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삶의 필요에 의해서 형성된 '앎'이 오히려 '삶' 위에 군림하며 유토피아적 세계라는 '있음'의 문지기 노릇을 자처한다. 삶의 요구에서 만들어진 이념이 삶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지배하려 든다. 종이 주인 노릇을 하니 소외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앎의 논리에 따른 '같음' 이데올로기는 다름으로 엮어진 삶의 생리를 부정한다. 그러나 실상 우리 삶의 출발은 다름이었다. 다름과 다름의 우연한 만남이라는 사건 속에서 어머니(다름)의 뱃속에서 오장육부가 만들어지고 빚어져 그 다름(어머니의 몸)으로부터 나와 다른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또 다름이 넘실거리는 세계 속에서 관계라는 틀로 타자(다름)와 이리저리 얽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왔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이른 바, 비동일적 정체성을 형성해 온 지난한 과정이었다. 이게 삶의 궤적이 그려낸 정체성의 본 모습이다. 그런데 동일성 신화에 빠진 앎이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그렇게 생겨먹지 않은 삶의 생리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주의의 극복은 포이어바흐가 강조한 사랑의 비종교화를 통해 가능하다. 사랑의 비종교화는 이념주의의 본질인 당파성을 거부하기에 그렇다. 같은 이념, 같은 신앙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념주의의 당파성은 다름 중의 다름인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정면 배치된다. 이는 또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립보서 2:3)며 타자에 대한 수용과 이해를 강조하는 성서의 말씀에도 어긋난다. 예수와 성서의 가르침은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것은 당파성이 아닌 포용성이다. 타자의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이념의 당파성을 버릴 때 비로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으로 타자의 다름을 이해할 수 있고 포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당파성이라는 이념의 강박에서 벗어날 때 마침내 서로 다른 이념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된다. 틀리기만 한 줄 알았던 다름과의 얽힘은 나아가 우리의 삶 속에서 자기 동일성 신화를 해체하고 타자를 통해서 발견되는 성숙한 자아의 정체성 형성에도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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