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다원주의(1) 니터: '참된 종교'
폴 니터(Paul Knitter)가 쓴 논문은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참된 종교이며 절대종교인가?'라는 물음을 제목으로 내세웁니다. 제목부터 음미해봅시다. 이를 앞서 살폈던 트뢸취의 논문 '세계종교들 가운데 처한 그리스도교'와 견준다면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요? 트뢸취는 세계종교들을 옆에 놓고 배타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다른 종교들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관계하는 틀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물론 그 방식은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들을 포괄하는, 일종의 우열관계로 설정해두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견주어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참된 종교이며 절대종교인가?'라는 제목은 어떤 뉘앙스를 갖습니까? 왜 구태여 '참된 종교'와 '절대 종교'를 열거해 놓았을까요? 이전에는 참된 것은 절대적이었고, 절대적인 것은 참된 것이었습니다. '참,' '절대'는 하나의 실재를 각기 다른 각도에서 가리키는 표현일 뿐이어서 다른 영역을 가리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니터는 이를 놓고 새삼스럽게 '참된 종교'가 '절대종교'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둘이 상호치환이 가능한 동의어로 사용되어도 괜찮은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 물음에 그리스도교가 출현한 AD 1세기에서 3세기는 어떻다고 답했나요? 또 4세기에서 15세기는? 16-17세기, 18-19세기, 20세기 이후에는 어떻게 답했을까요?
그리스도교는 소위 이방종교들이 융성한 가운데 미미한 하나의 씨앗으로 등장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소수자의 종교, 억압받고 핍박받는 종교였습니다. 헌데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로마제국에서 하나의 번듯한 종교로 자리 잡고 급기야는 국교로 공인됩니다. 1-3세기의 원그리스도교-원시 그리스도교가 아니고-에서 4-5세기 그리스도교로의 전환은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4-5세기 그리스도교의 눈으로 보면 1-3세기 그리스도교는 미미하고 볼품없습니다. 이후 그리스도교는 제국의 힘을 빌려 그 세력을 확장하고 17-18세기까지 위상을 확고하게 다집니다. 근세 이후 다른 문명과의 본격적인 접촉이 이루어지고, 신대륙의 발견 이후 다른 종교들과의 만남 속에서도 이 위상을 재천명, 재확인한 것이 배타주의입니다. 18-19세기에는 포괄 혹은 우월의 방식으로 바뀝니다. 보다 대대적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최고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로부터 '여러 종교들 중 하나의 종교'로의 전환이 20세기에 일어납니다. 니터가 그의 논문 제목에서 사용한 '하나의'라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 닿아 있습니다. 이 제목에서 '하나의'라는 표현은 이후에 물음표가 붙여져 의문문이 되기는 하지만 20세기의 다문화 현상을 반영합니다. 그런데 다문화라는 말에서 '다'(multi)라는 표현 또한 하나를 중심에 두고 주변을 돌리는 사고방식이 반영된 것이 아니냐고 비판하며 '상호문화'(intercultural)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의 차이에 따라 다원주의의 흐름이 갈라집니다. 그렇다면 이 논문에서 니터는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을까요? 읽기 전에 제목에서 미루어 먼저 생각해보십시오.
더 자세히 읽기 전에 먼저 절의 제목을 이어서 훑어봅니다: 그리스도교, 하나의 참된 종교 / 그리스도교, 절대 종교 /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참된 종교이며 절대종교라고 하는 사실로부터 나타나는 추론들 / 내부로부터의 결론들 / 외부로부터의 결론들 / 미래의 방향들: 교회중심주의에서 그리스도중심주의를 넘어 신중심주의에 이르기까지 / 종교들 사이의 통일적 다원주의.
절의 제목만 따라 읽어도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지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참된 종교'와 '절대 종교' 사이의 관계를 추론하기는 힘들지만, 니터의 문제의식이 어디서 시작해 어디로 향하는지 감을 잡는 데는 무리가 없습니다. 시작은 '그리스도교, 하나의 참된 종교'이고 끝은 '종교들 사이의 통일적 다원주의'입니다. 방향이 충분히 짐작되시리라 믿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서구그리스도교의 '일원적 다원주의'입니다.
본격적으로 논문을 살펴봅시다.
인간으로부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될 수 있다. ... 동료 인간과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방식은 역사적이며 사회적이며 정치적이다. 먼저 역사성이 인간됨을 뜻하며 인간을 구성하는 데 필요하다면, 그 역사성은 은총과 계시를 구성하는 데도 필요하다. ... 인간은 역사를 형성하고 이 세계의 구원에다 구체적인 실체를 부여하기 위해 하느님과 협력한다. ... 하느님으로부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될 수 있겠다. ... 하느님은 성사적 하느님이다. ...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신성의 가장 내적인 핵심에 있어서 성육신적인 하느님이다. (폴 니터,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참된 종교이며 절대종교인가?", 김승철 편역, 『종교다원주의와 기독교』 II [나단, 1993], 50-53)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논지 전개 방식입니다. 처음에는 '인간으로부터는'이라는 말로 시작하여 자신의 논지를 전개했다가, 그 다음에는 '하느님으로부터는'이라고 운을 떼고 이야기를 진행해 나갑니다. 이는 뒤에서도 반복됩니다. 글을 생각 없이 읽기 전에 지은이가 어떠한 방식으로 논지를 전개해 나가는지 머릿속에 담아두는 것이 좋습니다. 더 들어가, '인간으로부터는'이라고 말한 뒤 자주 등장하는 개념어를 살피십시오. 어떠한 개념이 반복되어 나타납니까? '역사'입니다. 니터는 계시와 종교의 관계에서 계시는 신에게서 온 것이고 종교는 인간의 세계에서 문화적으로 반영된 것이기에 당연히 역사성을 지닌다 말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초역사적인 계시 또한 역사라는 틀 안에 담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니터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의 참됨 또한 바로 역사의 차원에서, 역사에 담겨지는 계시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가 니터만의 독특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현대 신학자 중 대표적으로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역시 역사를 강조합니다. 그는 '역사로서의 계시'에서 더 나아가 '계시로서의 역사'까지 주장합니다.] 역사 뒤에는 차례로 사회, 정치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를 봅시다.
역사적인 것은 거의 사회적인 것을 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하나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가톨릭의 주제에 있어서 매우 중심적인 요소이다. 인격이 다른 자아와 함께 존재하지 않고 상호작용하지 않고서는 자기의 자아를 알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계시-은총은 종교적인 사회 밖에서는 알려질 수도, 습득될 수도, 그리고 경험될 수도 없다. (니터 51)
역사성이란, 인간들이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치적 존재라는 사실도 의미한다. ... 우리는 과연 은총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되지만 우리의 협력과 참여가 없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을 성취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니터 51-2)
"인격이 다른 자아와 함께 존재하지 않고 상호작용하지 않고서는 자기의 자아를 알 수도 없"다는 통찰은 다분히 현대적인 사고입니다. 고전적인 방식은 물론이고 데카르트까지만 해도 이러한 사고는 전개되지 않았었습니다. 니터는 일단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개념들-계시와 은총-을 언급하고 이를 인간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틀-종교, 역사, 사회, 정치-을 언급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과 신의 관계를 상호작용의 구도로 그려보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계시와 역사, 신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을 놓고, 이를 상호관계의 구도로 그려내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교의 참됨을 말할 수 있을까를 물으면서 말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교, 절대종교' 소제목 밑의 내용을 읽어봅시다: "우리가 가톨릭 교회론의 역사를 개관해 본다면, 우리는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라는 개념이 소위 배타적인 절대성으로부터 포괄적인 절대성으로 발전되어왔음을 주목하게 된다"(니터 53). '배타적인 절대성'으로부터 '포괄적인 절대성'으로의 발전, 이것이 앞서 묘사한대로 '하나이며 유일하게 참된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로부터 '최고의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로의 전환을 가리킵니다. '배타적인 절대성'은 비교를 불허합니다. 하지만 '포괄적인 절대성'은 비교를 통해서 최상급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로마 가톨릭의 역사에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시기까지는 전자에,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는 후자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니터는 이제 여기에도 물음표를 던지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합니다: "가톨릭이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참된 종교일 뿐만 아니라, 절대 종교이기도 하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사실로부터 유래하는 결론들은 그리 긍정적인 것 같지는 않다"(니터 56). 이 말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 배타주의를 견지하던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입니다. 예전에는 '참된 종교'일 뿐 아니라 '절대 종교'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둘 다 취할 수는 없을 뿐 아니라 이제 자고로 '절대'라는 것이 하느님 이외에 어떤 것에 대해서도 수식어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확고히 선언합니다. 종교라고 예외가 아닐뿐더러 오히려 '절대종교'야말로 온갖 폭력의 근엄한 주범이었다고 고발합니다.
인간이 자유의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행위를 설정하는 것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처럼, 로마 가톨릭교도들 가운데에서 불안과 공공연한 반란의 근본원인은 교리와 윤리, 그리고 제의적인 형식을 담당하는 교사들과 목회자들이 제공해 왔던 절대성의 특징에로 소급될 수 있다. 가톨릭교도들 중에는 이것을 신앙의 특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이 오늘날 참된 종교를 바라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절대 종교에 의해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거의 분명하다. (니터 56)
물론 이는 비단 로마 가톨릭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일단 '절대'에 대한 혁명적이고도 진솔한 비판은 집중과 주목을 요합니다. 종교의 절대화-이를 말하기 위해 니터는 종교와 계시, 믿음과 은총을 구분합니다-는 그릇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느님의 계시와 은총에 상응하는 인간의 협력에 해당할 신앙과 종교에 절대성을 들이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자 범주오류이고 문제들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유구한 역사를 지녀온 종교의 절대성 주장이 초래해 온 피폐의 구체적인 예로서 니터는 "권위와 교리의 신성화," "미신으로 빠지는 제의적이고 윤리적인 실천," "권위주의와 위선으로 변질된 윤리," "국외자들에 대한 '그릇된 의식'과 오만불손한 정체감" 등을 들어 예리하게 비판합니다. 그러고는 방향을 틉니다.
오늘날의 가톨릭교도들 가운데는 이데올로기들에서 가치들에로, 확신에서 탐구로, 율법준수에서 창조성으로, 단순한 회원자격에서 공동책임에로, 한마디로 말해서, 절대종교에서 참된 종교에로의 전환이 나타나고 있다. (니터 56)
각각의 전환들을 조목조목 살피면 이러한 전환이 어떠한 성격을 갖는지 보다 명백하게 다가옵니다. 이 맥락에서 이데올로기란 무엇입니까? 확고한 신념, 소유의 대상입니다. 가치는? 추구의 대상입니다. 전통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는 '소유'가 중요했습니다. 내가 무엇이든 대상을 잡고 끼고 앉아 있어야 합니다. 이와 견주어 이제 새로이 주목하는 '추구'는 잡을 수 없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계속 추구만 하다가 내동댕이쳐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러한 전환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현대인들이 근세인들보다 더 똑똑해서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니라면 능력이 상실되어서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저 '소유'에 기반을 둔 시도들이 삶에서 깨어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삶이 그렇게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소유한 줄 알았건만, 이내 날아가 버립니다. 어제 금과옥조의 진리였던 것이 오늘은 아닐 수 있음을 절절하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이 축적되다 보니 붕괴된 것입니다. '율법준수'와 '창조성,' '회원자격'과 '공동책임' 모두 비슷한 형태의 대조를 보입니다. '회원자격'에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들이댔던 사상가는 키르케고르입니다. 덴마크에서 태어났던 그는 당시 '국가교회' 체제에 반해 개체적 실존의 '결단'을 강조했습니다. '국가교회' 체제에서는 본인이 진정으로 믿든 믿지 않든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리스도교인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여기에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식으로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 모두를 니터는 압축적으로 '절대종교에서 참된 종교에로의 전환'이라 표현합니다. 배타적인 절대성은 물론이지만, 포괄적인 절대성마저도 그러한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비판을 한 뒤 '참된 종교'로 가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