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스(Burgos): 쉼
오늘은 처음으로 내일의 걱정이 없는 날이다. 이 도시에서 하루 더 묵기로 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의 매력 중 하나는 한 마을에서 이틀 묵는 일이 흔치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곳일지라도, 아무리 불편한 것이 있어도 두 번 머무는 것이 쉽지 않은 곳이 바로 이곳 산티아고이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이라는 시간 밖에 살아낼 수밖에 없는 곳, 잡고 있던 것을 계속해서 놓는 훈련을 하는 곳이 바로 여기 산타아고이다.
순례 중엔 짐을 싸고 푸는 것이 일상이지만 오늘은 일행들과 합의 하에 조금의 여유를 누려본다. 이곳 부르고스(burgos)에서 하루 더 묵기로 결정하고 평소보다 느지막이 눈을 뜬다. 하지만 어제의 무거운 감정이 여전히 내 몸의 안팎을 어루만지고 있다. 부피는 있지만 무게감은 없는,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단어가 푹 쉬었음에도 이 몸을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어렵게 잠에서 깨어나 '떠남'에 관한 생각을 끄적거려본다. 보이지 않는 감정을 글로 옮긴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무거운 감정을 흘려보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이 슬픔의 중력에 짓눌려버릴 것만 같다.
어려운 일이다. 떠나보내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참 어려운 일이다. 삶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산티아고 순례는 '만남의 설렘'과 '떠남의 슬픔'이 존재마다 가득 담겨온다. 두 주 가까운 시간동안 길 위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고 또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런 시간들 속에 우연이 인연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인생이 그러하듯 욕심을 채우려했더니 떠나갔다. 그리고 비워냈더니 다시 만나게 되더라. 인간을 향한 신의 장난은 어쩜 이렇게 짓궂은 건지.
이른 아침, 기약 없이 떠난 한 인연이 가슴에 가득 찼다. 길을 걸으며 만난 많은 사람 중에 특별한 감정을 심어준 사람이 있었다는 건 참 좋은 경험이었지, 생각을 해 보지만 큰 위로가 되지 않는다. 기회가 온다면,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땐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 순간을 붙잡지 않으면 기회는 다시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순간을 붙잡는다는 건 또 무얼 말하는 걸까? 대체 순간을 잡아 무얼 하고 싶었던 건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질문에 답을 얻으려 이곳에 왔건만 답 없는 질문이 다시 켜켜이 쌓이고 있다.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 여전히 귀에 왕왕댄다. "떠남과 만남과 돌아옴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만남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 그리고 자기와의 만남입니다. 떠나는 것도 그것을 위한 것입니다." (신영복, 『담론』, p.423)
일상을 벗어나 이곳에 왔다. 그리고 길 위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고 떠나보냈다. 어떠한 떠남이든 헤어짐은 반드시 한 사람 안에 상실의 흔적을 남긴다. 사람이든 감정이든 떠나야만 하는 것을 억지로 잡지 않는 것이 삶의 이치임을 모르진 않는다. 하지만 그 방법을 모르니 답답할 수밖에.
힘겹고, 조금은 버거운 시간을 경유해 나는 어떠한 나를 만나러 가고 있을까. 상실을 경험한 나는 이전보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었을까. 나는 또 어떤 새로운 나와 마주했을까. 조금만 더 걸어보며 내면의 변화를 지켜보려한다. 부르고스에 묵직한 추억 하나 남기고 떠나는구나.
#. 부르고스(Burgos)는 스페인 카스티야레온 지방 부르고스 주의 주도이다. 해발 850m 정도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군사 근거지이기도 했다. 현재는 농업 외에 모직물, 가죽제품, 화학비료 등의 공업이 번창했다.
부르고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화재가 바로 부르고스 대성당(Burgos Cathedral)일 것이다. 대성당은 1984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스페인의 유명한 문화재이다. 이는 프랑스의 고딕 양식이 스페인에 융합된 사례를 보여주는 훌륭한 건축물로 일 드 프랑스(Ile-de-France)의 대성당들과 건물들이 생겨나던 13세기에 착공해 15세기와 16세기에 완성되었다. 성당은 훌륭한 건축 구조와 성화, 제단 장식, 묘지, 스테인드글라스 등 다양한 예술 작품과 독특한 소장품들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