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와 묵상] 오래된 기도

이인기 목사(반포소망교회)

오래된 기도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시인(1959- )은 기도에 대한 통념을 재고한다. 통념상 기도는 소원이나 욕망의 성취를 신께 비는 행위이다. 어쩌면 그 행위는 결핍에 대한 간절한 반응일 수 있기에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재고하려는 의도는 그 통념이 신과의 대화라는 기도의 본질적 측면을 희석하기 때문이다. 대화란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일과 생각을 진솔히 나눌 때 상대방과 인격적 관계를 맺게 하는데, 만일 그 내용이 소원이나 욕망으로만 채워진다면 상대방을 지니(genie)나 보급창고로 비인격화하게 된다. 소원이나 욕망의 성취에 집중하게 되면 기도는 신과의 인격적 교류가 아니라 자기의 욕구를 신으로 섬기는 행위로 전락하고 만다.

시제(詩題)가 "오래된 기도"인 점은 시사적이다. 기도의 묵은 속성, 혹은 본질을 암시한다. 그런데 시인이 성찰한 기도의 본질은 다소 파격적이다.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그 정의에는 기도의 핵심이랄 소원이나 욕망이 언급되고 있지 않다. 통념에서는 기도가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신을 설득해서 자신의 소원이나 욕망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두드러져야 기도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라니, 일종의 우상파괴적 시도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오래된 기도"는 과도한 성취 욕구에 대해 아예 눈을 감는 행위이다.

그의 기도는 소원이나 욕망의 성취와는 거리가 멀다. 굳이 소원이나 욕망이 있다면,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거나,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거나,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거나,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거나,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고자 하는 것 등이다. 마치 무목적적인 몸짓인 듯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동작들뿐이다. 무위(無爲)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이 무위일 수 없는 이유는 기도란 본질적으로 말해서, 지향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감싸고, 모으고, 부르고, 멈추고, 떠올리는 등의 동작에는 의지가 실려 있다. 일상의 소소한 경험과 기억에 대해 무심코 지나치지 않고 사실상 가만히 눈을 뜨고자 한다. 무위의 역설이다.

그래서 어떤 형식이든 기도는 변화의 의지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기도가 일상에 대한 성찰의 표현이기도 한 이유이다. 그는 음식을 서둘러 먹는 게 아니라 오래 씹고자 하고, 환한 전등을 끄고 촛불 한 자루를 밝혀놓고자 하며, 무심히 숲길을 걷기보다 솔숲을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고, 동료들과 한담하는 게 아니라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고자 하며,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고자 한다. 이처럼 기도는 습관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얼핏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듯이 들리기는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기도란 신에게 하는 것이므로, 그는 신께 자신의 일상생활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자신의 삶의 태도를 구체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므로 그의 기도는 진실한 마음으로 신의 뜻을 찾고자 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그 변화의 양상들이 신의 뜻을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기도는 우리의 일방적인 요청이 아니라 신과의 대화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기도에서 이상적인 목표가 완전히 배제될 리 없는 이유이다. 명백히 삶은 자연과 우주와 사회와 인생에 관한 성찰과 상념에 영향을 받는다. 시인은 아마도 현재 섬과 그믐달과 바다와 별똥별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며 기도하는 듯하다. 외로운 섬과 같은 존재들을 서로 이어주고, 어두운 그늘에도 시선을 보내며, 성과에 주목하기보다 기억의 뒤편에 물러나 있는 초심을 돌아보고, 유려한 궤적보다 불이 타듯 마찰하는 현장을 조금 더 주시하며, 그 현장에서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죽을 것만 같아도 그것도 인생의 일부임을 인정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는 앞서 왼손과 오른손을 감싸고서 가슴 앞에 모은 뒤에 누군가를 기억하며 노을 비낀 오솔길의 한켠에서 져버린 꽃과 같은 그의 인생이 회생하기를 기도했을 수 있다. 그는 마음을 정갈하게 가다듬고 천지만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갓 태어난 아기의 눈에서 생명의 힘을 발견하고서는 그 기쁨에 두 다리로 그 힘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는 신의 뜻을 읽은 듯하다.

이것이 인생의 "평범한 진리"일 수 있을까? "오래된 기도"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러하다. 그가 일상의 소소한 경험과 기억에서 삶의 본질적인 모습을 읽어내고자 한 시도들은 결국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의 변주이다. "나의 죽음"은 일차적으로 육체적 죽음을 가리키지만, 자신의 욕망만을 전면화함으로써 일상을 죽은 것처럼 무심히 지내온 행위도 가리킨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삶은 변화를 추동하고 있었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라 깨닫게 한다. 그 순간 일상의 소소한 경험과 기억을 낯설게 볼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가 "평범한 진리"를 언급한 것을 보면 누구나 이 역량을 갖고 있다. 다만, 욕망 아래 묻혀 있도록 방치하는 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그러면 일상을 기도하는 심정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 기도일 수 있겠다. 그는 이것이 "평범한 진리"가 되기를 기도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한다. 그래서 비범하다.

그러나 "평범한 진리"가 비범하게 여겨지더라도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현실이 언제나 진리와 동행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모든 시도가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이 동작은 앞서 언급한 모든 지향적 동작들을 대변한다. 기도란 욕망의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을 들이마시는 것이다. 하늘과 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에 대해서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이르셨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6). 은밀한 기도란 번화하거나 성취주의적이지 않고, 일상생활의 성찰과 변화를 조용히 다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행위이다. 그 대화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격적으로 이끌어간다. 그것이 "오래된 기도"이며 오래갈 기도이다.

※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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