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시인(1964- )은 인생사에서 공감과 지지와 격려의 필요성을 의자의 쓰임새를 통해 실감나게 묘사한다. 공감과 지지와 격려가 이어져서 과중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 모두를 의자가 해낸다. 물론, 그가 의자의 속성을 형상화하고자 의도하지는 않았어도 어머니의 말씀을 통해서 인생살이를 지속시키는 힘이 그런 속성과 관계있음을 알리고 있다. 시적 상황상, 그녀가 아들에게 훈계하고 있으나, 사실 그녀가 아들에게는 의자와 같은 존재였다. 의자가 의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니까 그 말은 진실하다. 세상은 혼자서가 아니라 더불어 뒷받침해주며 살아야 한다.
어머니는 "병원에 갈 채비를 하[신다]."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가는 것은 병든 몸을 의자에 앉히는 일이다. 그녀에게는 의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녀는 기력이 소진되어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한 소식 던지신다." '한 말씀'하신다라고 해도 될 것을 굳이 "소식"이라는 시어를 선택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듯하다. 소식(消息)의 원래 뜻이 소멸과 생성을 연상시키므로 어머니의 말씀은 소멸과 생성으로 구성된 인생살이의 진리를 들려주고 있다.
그 진리는 어머니가 체험한 바이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전라도 사투리에 실린 호소가 투박한 만큼 짠하다. 허리가 얼마나 아팠으면 온 세상에다 도움을 요청할까.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범상치 않다.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그녀가 의자에 앉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미 표명하였는데, "꽃도 열매도" 사실은 모두 다 아픈 존재라는 말인가? 아프지 않고서야 의자에 앉을 일이 없지 않은가? 자신이 아파서 모두가 아픈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아니면, 만물의 실존적 조건을 그렇게 이른 것인가? 어느 경우이든 세상살이에는 의자가 필요하다. 공감이 필요하다.
공감은 이승으로부터 저승까지 연장된다.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물론,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픈 어머니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린 것 자체가 그녀의 공감을 이승의 벽 너머로 이은 것이다. 그로써 다른 한 편으로는 아픈 자신에 대한 아들의 공감을 은연중에 요청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추억을 소환한 것은 그 기억을 실현하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다. 그 욕망이 실현될 자리는 당연히 어머니이다. '그래도 큰애 네가 나한테는 좋은 의자 아니냐'라고 말한 셈이다. 그녀는 혼자 남은 처지에서 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어쩌면 이기적인 욕망을 표현하는 듯이 들린다. 그런데 어머니는 혼잣말을 잇는다.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병원에 오갈 때는 아들이 동반했을 것이므로 그녀가 침을 맞고 올 때는 아들의 공감과 지지를 받은 상태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미 의자에 앉아 있는 참외와 호박에게 "의자를 내줘야지"라고 다짐할까?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 아래에 지푸라기를 깔고 똬리를 받치는 것은 의자 밑에 의자를 덧대는 것과 같다. 따라서, 앞서 모든 것이 의자에 앉은 것이라는 말씀은 세상 만물의 실존적 조건을 암시한다. 그녀는 인생살이의 속성을 통달하였다. 인생살이는 특별한 이유 없이도 "그것들도 식군데"라는 생각으로 서로를 격려하는 일이어야 한다. 격려하는 것이 원래 바탕에 힘을 북돋우는 일이므로 모두가 실존적 조건을 안고 사는 바탕 위에서 그 바탕을 추상화할 것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구체적인 관계로 치환하여 생명의 힘을 보태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그녀의 식구 의식은 가족이기주의의 성향과는 결이 다르다. 동일한 실존적 조건 아래에 있는 공동체로서의 의식에 가깝다. 세상은 공감과 지지와 격려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아들에게 주는 구체적인 교훈도 사실상 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녀는 달관한 듯 말하면서 세상살이의 바람직한 원리를 일반화해야 할 필요를 암시하였다. 그 원리는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사람들이 한 식구처럼 살 수 있게 하는 기본적인 원리는 "내놓는 거"이다.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를 고르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요, "의자 몇 개 내놓는 거"는 배려할 때 인색하게 굴지 말라는 뜻이다.
공감과 지지와 격려가 삶의 동력이다. 그것이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실존적 조건 아래 살고 있음을 인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서로 의지해야 할 이유를 확인하고 각자에게 힘을 북돋우어 앞으로 나가게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 모범을 보이셨다. 그분은 오빠를 잃은 자매와 함께 우셨다. 곧 오빠를 살려내실 것임에도 그들을 설득하기보다 그들의 슬픈 마음에 공감하신 것이다. 그리고 오빠를 떠나보낸 그들이 홀로 남겨지지 않았음을 알도록 친히 그들을 불러 위로하셨다. 또한, 부활을 실감하도록 죽은 오빠를 살려내어 부활에 대한 믿음을 격려하셨다. 이와 같이 사람들과 공감하며 지지하고 격려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잠언의 지혜자는 상대방을 공감과 지지와 격려를 마땅히 받을 자로 여기라고 말한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라]"(잠언 3:27-28). 마땅하다고 여길 때 베풀기를 아끼지 않고 지체하지 않게 된다. 이는 "그 [사람]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라고 마음먹을 때 가능한 일이다.
※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