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얼마 전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세례
세례식은 성찬식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세례식은 일년에 한 번 부활절에만 거행하였는데 유아세례는 부활절이 아닌 때에도 수시로 베풀었다. 세례는 신자의 평생에 단 한번만 받는 것이었다.
세례를 받을 사람은 상당히 긴 기간에 걸쳐 공부하고 교리 시험을 쳐야만 했다. 세례 지원자의 신분 조사도 엄격했다. 종노릇하는 사람은 주인의 허락을 받은 증서를 제출해야 했고, 결혼한 사람은 부부관계에 흠이 없어야 했으며, 미혼 남성은 이성문제가 결백해야 했다. 직업이 부도덕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사람, 정신이상자는 제외되었다. 세례 지원자들은 적어도 2년 동안 교회에서 신앙지도를 받아야 했고 그들의 신앙과 행위를 보증해줄 사람들의 증명이 있어야 했다. 특별히 수난주간 이전 40일 동안에 세례 지원자들은 날마다 금식하고 참회하는 생활을 하였는데 이것이 사순절의 기원이 된다. 수난주간 수요일에 감독의 주관 하에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부활절 날 세례장에 나가서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았다. 물 속에 잠기는 침례를 받든지 머리에 물을 뿌리든지 혹은 분수구 아래 앉아 세례를 받았다. 그런 후 감독이 그들을 교회당으로 데리고 가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고 안수기도한 후 세례교인이 된 것을 선언하였다.
기강
교회는 교인들에게 엄격한 신앙생활을 권고하였다. 세례 받기 위해서는 긴 시간 준비해야 했으며 금식과 신앙고백 등 요건도 까다로웠다. 세례 받은 후의 기강도 철저하여 죄를 범한 사람은 처벌받았다. 「12 사도들의 교훈」이라는 문서가 당시 교회의 기강을 기록하고 있다.
문서에 따르면 교인들은 매 주일예배 때 열리는 성찬식에 빠짐없이 참예해야 했으며 여러 번 불참하면 징계를 받았다. 이 전통이 오늘날에도 전승되어 성찬식의 참예 여부를 밝히는 출석카드를 개개인에 발급하고 있다. 또 성찬식에 참예하기 전 이웃과의 불화한 관계는 반드시 화해되어야 했다.
이 문서는 생명의 길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자신을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며, 남을 해치지 말라. 남이 가지고 간 내 재물을 돌려받지 말며, 필요하지 않은 것을 받지 말며, 기증할 것이 있으면 적당한 대상을 찾기까지 쥐고 있으라. 아무 것이든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궁핍한 자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일구이언하지 말고, 두 마음을 품지 말며, 교만과 탐심과 허영을 버리고 인내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주께 하듯 공경하고, 모든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줄 알라. 자녀들 가르치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고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공경하도록 가르치라. 종들에게 가혹하게 명령하지 말고, 종들은 주인들에게 하나님께 복종하듯 하라.
사망의 길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 살인, 음행, 도적질, 거짓증거, 마술, 교만, 질투, 완고, 고자세, 안하무인, 선한 자 박해, 진리를 미워하는 일, 정직에 대한 보상을 모르는 일, 가난한 사람에게 무정한 일, 눌린 자를 위하지 않는 일, 창조주를 모르는 사람, 하나님의 형상을 더럽히는 일.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
신자인 아내를 불신자인 남편이 박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회 절기에 금식하고 있을 때 연회와 잔치를 열고, 부활절에 교회에서 철야하는 것을 반대하여 좌절시키고, 타교인의 가정을 방문하는 것을 방해하곤 했다. 당시 남편들은 자녀를 소유물로 생각하여 여아가 출생하면 밖에 내어버리기도 하는 등 무자비하였다.
그리스도인 가정 중에도 노예를 거느린 가정이 있었다. 당시에 노예제도를 교회가 정식으로 반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노예들은 주인에게 복종하도록 가르치고 주인이 그리스도인인 경우에는 종을 박대하지 말고 가능하면 해방시켜줄 것을 권고하였다. 만약 해방시켜주면 교회에서 주인과 종을 회중 앞에 세워 크게 환영하고 치하하여주었다.
군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에 봉착하였다. 군대에는 황제의 신전이 있어서 군인들은 거기에 단체적으로 분향하고 제물도 바쳤는데 거부 시에는 엄벌을 받았다. 바실리데스라는 한 그리스도인 군인이 순교한 일이 있었는데 그가 최초의 순교자라는 말이 있다. 이때 교회 감독은 교회 청년들에게 징집을 기피하는 것이 좋다고 권하기도 했지만 공공연하게 징집을 반대할 수는 없어서 난처한 입장이었다. 살인은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어서 참전을 반대한 감독도 있었으나 이것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 문제여서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관청에도 황제의 신전이 있어서 공무원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다.
초대교회 감독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가 로마정권과 대립하는 것을 피하였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라는 예수의 말씀도 있고 바울과 베드로도 정권에 복종하고 국법을 지키도록 권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대나 관청에 비치된 신전의 참배 문제는 신앙의 문제였으므로 사도들의 교훈을 따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직업도 성서말씀과 양심에 따라 기피할 것이 많았다. 우상을 만드는 수공업을 피해야 했으며 투기장에서 짐승과 싸우는 일이나 심지어 투기장 입장권을 동물의 뼈로 만드는 일까지도 피해야 했다. 이교사원의 제물이 될 짐승을 죽이는 칼을 갈거나 닦는 일, 고리대업도 삼가야 하는 등 그리스도인들은 매일같이 양심의 날을 세워 직업을 취사분별했다. 교회 또한 부도덕한 직업이나 노동으로 번 돈의 헌금을 물리쳤다.
교회 건물 없이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리던 초대교회는 교회에 속한 땅이 없어서 사망한 그리스도인들을 매장할 묘지를 갖지 못하여 장의사를 만들어 허가를 받고 장의사가 소유한 땅에 그리스도인들을 묻기도 하였다. 유행병이 돌 때 많은 사람들의 시체가 아무 곳에나 버려졌는데 그 병이 마신에서 왔기 때문에 시체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생긴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버려진 시체는 썩어서 병균을 만들어서 전염이 확대되어갔는데 그리스도인 장의사는 그러한 미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시체들을 땅에 묻어주어서 병의 확산을 막았다.
그리스도인 시체를 묻을 땅이 없었으므로 로마시의 외곽 지대에 땅굴이 있는 것을 알고 거기에 시체를 묻은 것이 오늘날 남아있는 카타콤 즉 지하묘지가 된 것이다. 폭군 도미티안이 죽인 그의 질녀 도미틸라는 자신의 소유를 그리스도인들의 묘지로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