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예배당을 우상화하는 교회주의 극복
기록된 계시에 하나님을 가두는 것 못지 않게 신성모독적인 오류로 자가당착에 삐지는 것이 예배당 우상화로 일컬어지는 교회주의다. 예배당 우상화가 문제인 것은 하나님이 예배당 안에만 계시다는 자기기만적 허위의식을 통해 예배당에 자기의 절대화된 믿음을 투사함으로써 예배당 자체를 신성시 하고 절대시 하는 우상숭배 행위를 벌이도록 한다는 데 있다. 기록된 계시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하나님을 특정한 시간성에 속박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면 예배당 우상화는 특정 공간으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가두는 오류에 빠져 있다.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며 예배당을 절대화 하는 이들은 예배 드리는 장소일 뿐인 특정 공간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고 신성시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임재 장소를 예배당 안으로만 국한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배당 우상화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좁디 좁은 예배당 공간에 가두어 예배당 바깥 일에는 무관심한 '눈먼 하나님'이라는 왜곡된 신 인식을 불가피하게 초래한다. 이러한 신 인식의 문제점은 신앙과 삶의 괴리를 부채질 한다는 데 있다. 구체적으로 도덕적인 양심을 마비시켜 예배당 안에서는 종교적 경건을 추구하지만 예배당을 나서면 비도덕적인 삶을 견지하는 이중적 태도를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예배당 우상화는 신앙과 삶의 괴리를 부추겨 비도덕적인 신앙인을 얼마든지 양산해 낼 수 있는데 이는 예배당 우상화 이면에 깔린 왜곡된 신 이미지에서 파생되는 현상이다. 예배당이라는 특정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신의 눈은 가리워지는 것이기에 신이 부재한 일상은 신이 아닌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신이 부재하다고 인식하는 예배당 바깥의 공간은 신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허용하는 세속화된 공간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세속화된 공간에서 벌어질 일들을 예측하며 던진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도 같은 맥락에서 곱씹어 볼 수 있으며 포이어바흐의 다음과 같은 언명을 되새겨 보는 것도 유의미하다. 이를테면 "신앙의 최선을" 이유로 가진 자가 예배당에서의 신성한 예배 활동을 위해 같은 시각 예배당 바깥에서 못 가진 자의 노동력을 착취해 못 가진 자가 주일성수를 지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합리화될 수 있다는 얘기다.
"예컨대 도덕적으로는 나쁘지만 신앙이라는 측면에서 칭찬받을 만한 행위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위들은 신앙의 최선만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모든 행복이 신앙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다시 신앙의 행복에 달려 있다. 신앙이 위기에 직면하면 영원한 행복이나 신의 영광도 위기에 직면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신앙의 촉진을 목표로 하는 모든 것에 특권을 부여한다. 신앙은 엄격한 의미에서 인간 속의 유일한 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 자체가 유일하게 선한 본질, 최초의 최고의 계명 그러므로 바로 신앙인 것과 같다."(<기독교의 본질>, 409)
또 다른 한편 예배당 우상화는 하나님을 거룩하게 모신다는 미명 아래 일상의 밖으로 하나님을 쫓아내 예배당 공간이라는 특수한 공간, 다시 말해 비일상성 속에 가두는 행위를 끊임없이 부추겨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를 두고 본회퍼는 옥중서간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불완전한 인식의 한계 밖이 아니라 인식의 한계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신자들의 일상에서 추방된 하나님은 본회퍼의 지적대로 자기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 예측불가한 사건을 만날 때만 비로소 문제 해결을 위해 긴급하게 소환되는 응급처치자로서 전락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인식의 한계가 밀려나면 밀려날수록 하나님도 부단히 뒤로 밀려나게 되어 하나님과 조우할 수 있는 가능성도 줄어든다.
살펴본 바와 같이 예배당 우상화는 하나님을 인식의 한계 밖으로 밀어내고 신자들로 하여금 일상 속에서 이미 해결된 물음들을 재료로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과 조우하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일상의 변두리에 불과한 특수한 비일상적 공간이 아니라 삶의 한복판에서 우리와 친교를 나누기 원하신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구실로 하나님을 예배당이라는 특수하고도 비일상적인 공간에 가두는 것은 독실한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가당착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 삶의 변두리에서 찌거기나 청소하려고 또 도우시려고 찾아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한복판에서 우리를 만나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응급처치자가 아니며 우리의 가능성의 한계가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서 인식되어야 한다네. 죽어 가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고난이 아니라 건강과 능력 안에서, 죄가 아니라 행동에서 하나님은 인식되기를 바란다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 안에 놓여 있자. 그는 삶의 중심이며 그는 결코 우리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답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네."(<저항과복종>, 580-581)
예배당 우상화가 가진 또 다른 문제는 특정 공간이나 장소와는 무관하게 참 성전으로 살아가야 할 신자들 자신의 직무유기를 방조하는 기제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전 3:16-17)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집이기 때문이다. 또 이 집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심판하실 것을 예고하며 거룩해질 것을 요구한다. 예배당 우상화는 그러나 예배당 안에만 하나님이 계시다는 왜곡된 신관을 바탕으로 예배당 밖 일상 속에서 자기 욕망에 휘둘려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할 자기 몸을 더럽힐 수 있는 가능조건을 제공하고 있다.
하나님을 예배당 바깥이 아닌 예배당 안으로 몰아넣고 예배당을 절대시 하는 예배당 우상화 현상의 근본 원인을 우리는 하나님을 길들이고자 하는 종교적 안전 추구 욕망에서 찾을 수 있다. 예배당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믿음은 익숙한 교회 전통 또는 관습으로 낯선 하나님을 예배당이라는 특정 공간에 위치시켜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길들이고 일상화 시키는 종교적 행위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관한 한 낯선 공간에 해당하는 예배당 밖에서 불현듯 맞닥뜨릴 수 있는 신의 현현이 가져올지 모르는 두려움과 공포 때문이다.
루돌프 오토가 말한 바 신의 현현에서 우리는 두려움과 이끌림이라는 양가감정을 갖기 마련인데 예배당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절대시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어서 예측 가능성을 높임으로써 두려움을 줄이고 이끌림을 늘려 종교적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가련한 동기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종교적 안정성을 추구하는 욕망에 휘둘려 예배당을 우상화 하는 것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온 우주가 집이신 하나님을 좁디 좁은 특수한 공간에 가두어 모독하는 자가당착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배당에만 계시다는 자기기만적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예배당 우상화의 극복은 역시 포이어바흐의 투사의 불가피성을 수용하는 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예배당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과 동일시 하는 자기 믿음을 예배당에 투사해 예배당을 절대해 왔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야말로 예배당 우상화 타파의 지름길이다. 예배당이라는 특수하면서도 익숙한 공간에서 하나님을 일상화시키고 길들이지 못하는데서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올 수 있지만 그것을 견딜 때야 비로소 왜곡된 신 이미지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과 맞닥뜨리는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또 한편 예배당이라는 특수한 공간만이 아닌 우리의 일상의 한가운데서 나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인식의 한계 밖 주변부로 더 이상 밀어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 밖인 예배당이라는 특정 공간에만 갇혀 계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의 한계 안에서 또 우리의 일상의 한복판에서 해결되지 않은 불가사의한 문제들이 아닌 이미 해결된 소소한 일상의 문제들을 재료 삼아 우리를 부르시고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예배당은 일상의 한가운데서 이렇듯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된 지체들이 모여 하나님을 주목하며 함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집이지 하나님의 성전 자체가 아니다. 예배당을 절대화하고 신성시해 참 성전이신 하나님을 모독할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