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다원주의(4) 스위들러: '종교간 대화'
레오나드 스위들러(Leonard Swidler)는 누구보다도 '종교간 대화'를 본격적으로 강조합니다. 아주 더 구체적으로는 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을 그의 주요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의 글 제목이 이를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종교 또는 이데올로기 간의 대화: 오늘날 모든 조직적인 반성을 위한 기반"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이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제목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반성'이라는 개념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반성도 '삶의 의미와 살아가는 방법'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서두에서부터 분명하게 밝힙니다. 종교가 아니라 인간이 목적이요, 그것도 인간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삶이 관심의 초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과 종교의 관계는 결코 내용적인 동어반복이 아니라 밀고 당기는 것이었으며 종교의 정체와 현실에 대한 논의도 인간에 대한 고려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엄연한 과제를 너무도 쉽게 잊어버리는 종교 논의에서 특별히 돋보이는 출발입니다.
종교에 관한 논의는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또한 인간도 추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점을 새삼스레 강조한 스위들러는 바로 그러한 목적과 방법을 위해서 그의 지론을 대화의 의미로부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고 변화되고 성장하기 위해서 대화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나 대화에 대해서 그동안 교회가 취했던 태도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두 세기 전 쯤 교황 그레고리 16세는 타종교인과의 대화를 '미친 원리'라고 하면서 불허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난 세기 중엽 교황 바오로 6세는 제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현대사회를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과정이 대화를 요구한다"고 강변했습니다. 어떻게 한 세기만에 이런 극적인 전환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 근본이유를 분석하는 스위들러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직설적이어서 여기에서는 그의 글을 주로 직접 인용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보면서 그렇게 글을 엮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한 전환의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진리관의 혁명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세기까지 진리에 대한 개념은 주로 절대적이고 배타적이었던 것에 반해서 그 후로 그것은 비절대적이고 역동적이며 대화적인, 곧 한 마디로 '관계적'인 것이 되었다"(레오나드 스위들러, "종교 또는 이데올로기 간의 대화: 오늘날 모든 조직적인 반성을 위한 기반," 김승철 옮김, 『종교다원주의와 기독교』 II [나단, 1993], 129).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관계'일 것입니다. 관계는 전통적으로 고전형이상학이 옹립하는 실체와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실체가 자기 스스로 충분하여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존성을 가리킨다면 관계는 타자 없이는 자기가 성립조차 할 수 없다는 타자의존성을 기본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런 타자의존성은 실체의 위상에 저해되는 것이니 부수적이거나 열등한 것으로 억제되었었습니다. 심지어 근세에는 실체라는 위상을 인간 주체에게까지 적용하게 되었으니 실체와 관계의 비대칭적 불균형은 이 시대에 오히려 절정으로까지 치달아갔다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실체의 위치에서 중심적인 주체로서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 것을 꿈꾸었지만 과학주의의 붕괴와 허무주의의 도래는 그러한 근세를 붕괴시키고 인간을 소외와 불안, 절망의 나락으로 내동댕이쳤습니다. 바야흐로 찬란한 듯 보였던 근세는 던져지고 저주받은 실존의 절규와 함께 현대라는 적나라하게 처절한 시대로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스스로 존재하여 스스로 충족하는 실체로서의 주체라는 것이 얼마나 환상이고 허상인가가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나로 살아가는 것이 나 스스로 존재하고 충족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남들의 얽힘에서부터 비롯되며 심지어 그 남들의 얽힘이 오히려 나를 이루어간다는 것을 새삼스럽고도 소스라치게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명실공이 타자의존성이 자기의 존재근원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관계를 실체보다 앞서, 위로 되돌려 위치 짓게 만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실체에 대한 관계의 역전입니다. 대전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환은 스위들러의 분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일련의 항목들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먼저 시간의 차원에서 진리는 역사의 과정에 따라 결정되고 변화합니다. 아울러 공간의 차원에서 진리는 지리, 문화, 사회적 입장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 또한 언어가 가리키는 실재, 특히 초월적 실재에 대해서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으니 절대적일 수 없고, 결국 언어가 언어에 담으면서 이미 벌여내는 해석으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채색될 수밖에 없으니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것이 종교간 관계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바로 스위들러가 주목하는 '삶을 위한 반성'의 뜻이 또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거기 그렇게 있는 있음에 대해서, 그리고 이와 관련된 앎을 살피는 데에서는 시공간은 부대상황일 뿐입니다. 언어와 해석도 부수적인 것처럼 간주될 뿐입니다. 마치 언어와 해석 없이도 그것이 이미 그렇게 있고 그렇게 그대로 알려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삶을 덮어둔다면 타당해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삶입니다. 아니 삶이 아니라면 문제일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삶이 이미 문제이고 물음입니다. 삶이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고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삶은 이미 저마다 그리고 때마다 곳마다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있음을 보고 앎으로 새기며 겪어내는 삶이 그러하기 때문에 있음만 가지고서, 또한 있음에 대한 앎만을 가지고서는 살 수 없습니다. 삶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이 그렇게 생겨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이 고개를 쳐들고 있음과 앎을 거슬러 밀고 들어간 것은 인류역사에서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19세기 이전에 유럽에서는 진리는 아주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양자택일의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많은 학자들은 어떤 진리의 의미에 대하여 진술한 모든 것이 그들의 역사적 환경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삶의 자리에서 동일한 본래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삶의 자리가 변한 만큼 다른 진술들이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스위들러 131)
삶의 자리가 우리를 주무른다는 것을 홀연히 발견하면서 시간과 역사에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근세후기에서 현대초기로 넘어가면서의 일입니다. 이제 역사에 대한 통찰을 시작한 근세후기의 유산을 물려받은 현대인들은 진리의 역사성에 주목하며 그 역사성이라는 내용이 관계성이라는 형식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꿰뚫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관계성이 그저 무색무취의 형식적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향한 지향성을 지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정신의 핵심입니다.
스위들러가 인용한 쉘러(Max Scheller)는 이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어떤 사람에 의해서 진술된 사상의 진리는 사유자의 행위에 방향이 맞춰진 지향성으로 인하여 비절대화된다. 이것이 진리의 실천적 차원이다"(스위들러 132). 지식사회학자 만하임(Karl Mannheim)도 같은 맥락에서 "모든 실재는 인식하는 사람의 문화적, 계급적, 성적 견지로부터 인식되고 ... 여하한 진술도 장소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니 관점적이고 관계적"(스위들러 133)이라고 강변했습니다. 더 나아가 진리는 진술의 형태에서 언어의 한계라는 문제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레 읽혀지면서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과 같은 언어철학자들은 "실재가 거의 무한히 많은 관점들로부터 보일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언어는 동시에 단지 하나 또는 매우 극소수의 관점들로부터만 사물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스위들러 133)에 절대적일 수 없다는 점을 폭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진리의 역사성에 주목하는 역사철학, 진리의 사회성을 말하는 지식사회학, 진리를 진술하는 언어의 한계를 폭로하는 언어철학으로 표출되는 현대의 시대정신은 이제 해석학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스위들러는 가다머(Hans-Georg Gadamer)와 리꾀르(Paul Ricoeur)를 현대해석학의 선두주자로 내세우면서 이러한 점을 강조합니다. 이들의 통찰을 스위들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면서 역시 진리의 절대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삶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허상인지를 고발합니다:
모든 지식은 해석된 지식이다. 그리고 인식하는 사람조차 인식된 것의 일부분으로 포함된다. ... 나는 실재를 듣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 실재에게 특별한 범주들과 언어를 부여하며 실재는 나에게 그 범주들과 언어로 그 속에서 말하고 응답한다. ... 실재는 내가 이해하는 언어, 범주들 속에서만 나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 실재가 말하는 것을 더 이상 내가 이해할 수 없게 되면 여기에 새로운 언어가 있다는 것과 또한 실재가 나에게 말하는 것을 알아듣고자 한다면 나는 그것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진리 구성의 대화적인 성격이며 그 이름이 바로 관계성이다." (스위들러 135-6)
이렇게 보면 이제 우리는 진리의 절대성이라는 것이 환상이었고 허상이었으며 결국 우상이었음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진리의 이름으로, 절대성을 근거로, 얼마나 많은 억압과 폭력이 인간에게 저질러져 왔는가를 돌이켜본다면 그것이 우상이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대로 우리를 억압해 왔었다면 이러한 전환은 참으로 해방적인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절대성으로부터의 전환이 오히려 자유를 향한 삶을 위한 반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여기서 이렇게 결정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말씀에 다가가는 길을 하느님께서 이와 같은 세속사의 진전을 통해서 열어주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