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며: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적 통찰에서 우상파괴로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적 통찰에서 우리는 인간의 집요한 자아도취적 우상숭배 경향을 적발할 수 있었고 또 그 우상파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인격주의적 신관의 문제를 비롯해 이념주의, 문자주의, 교회주의 등에서 우리는 인간이 자기중심성에 근거해 자기 믿음을 절대화함으로써 결국 자기 믿음을 믿고 숭배하는 자기 우상화라는 우를 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인격주의적 신관이 문제인 것은 인간 자기 앎의 확신에 근거해 길들일 수 없는 초자연적 질서를 길들여 하나님을 통제하고 조정하고 예측하는 등 하나님을 자기 포켓 속에 집어 넣으려는 신성모독 행위를 벌인다는 데 있다. 이는 또 한편으로 그러한 인간의 '앎'의 틀에서 벗어난 하나님과의 우연한 만남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기에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하지만 인간의 앎의 확신의 감옥에 갇혀 있을 하나님이 아니시다. 이른 바, '모름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생소하고 낯선 자연법칙의 비정한 세계를 길들일 수가 없듯이 하나님 역시 인간의 고착화된 관념으로 옭아맬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아니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격성을 갖춘 분이라고 상정한다면 마찬가지로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이 자연의 속성인 무인격성을 갖추지 않았으리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현대 실존적인 무체험인 허무와 불안 속에서 인과율과 목적론이라는 앎의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격주의적 신관은 오히려 그 허무와 불안을 가중시켜 불신앙을 초래할 따름이다. 인과율과 목적론에 따라 작동되어야 하는 하나님이 앎의 방식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때 오는 절망과 실패의 경험이 누적될수록 오히려 신-인 관계에서의 인간 소외 현상은 더욱 심화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 소외 뿐만이 아니다. 때때로 인간의 '앎'의 틀에 구속된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악신으로 둔갑하기까지 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운운하며 하나님이 세월호를 빠트리셨다느니 하나님이 코로나 펜데믹을 일으키셨다느니 하는 주장들이 그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속속 들이 안다는 그 '앎'의 확신은 하나님을 소비재로 만들어 마음대로 주무르고 이용하며 고갈시키고 있다.
포이어바흐는 집요하리만치 끈질긴 인간의 신의 의인화 또 자기 우상화 시도를 간파하고 이를 주술 구조의 전복 효과를 통해 다음과 같이 간단히 서술한 바 있다. "종교는 이들 술어가 신 자신의 존재와 구별되지 않으며 인간이 신에 관해서 만든 표상이나 형상들이 아니라 진리,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종교는 의인화 현상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기독교의 본질>, 91) 인간적 술어를 신적 주어로 둔갑시키는 행위를 내내 벌이면서 자기를 속이고 있는 자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조차 모르는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깔끔한 앎으로 정리할 수 있으며 하물며 그런 조잡한 앎으로 신을 길들이려 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단 말인가?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적 통찰에서 우리는 종래의 신관이 인격성에 매몰되어 자가당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확인했으며 이를 넘어서는 경지로 향하기 위해 먼저 인간 자기 자신이 '무지의 지'에 해당하는 모름의 영역인 무인격성을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는 현실적 당위성까지 짚어봤다. 여기서 신에 대한 모름의 수용은 인간 자신이 '앎'의 확신이라는 자기 우상을 파괴하는 자기 비움의 실천에서 가능해진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 이념주의, 문자주의, 교회주의를 관통하는 자기 믿음의 절대화, 우상화에 대한 처방으로 포이어바흐의 당파성 극복을 위한 비종교화와 투사의 불가피성 수용 등을 제시했다. 먼저 이념주의의 본질인 당파성은 이를 거부하는 포이어바흐의 사랑의 비종교화를 통해 극복이 가능하다. 사랑의 비종교화는 당파성이 아닌 포용성을 가리키는데 이는 예수와 성서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성서는 우리 곁에 두기 싫어하는 혐오하는 자, 못 가진 자, 약한 자에게 대접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가르침도 다르지 않다. 원수를 사랑하라며 당파성을 거부한다. 성서와 예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사랑의 비종교화는 틀리기만 한 줄 알았던 다름과의 얽힘에서 자기 안의 모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타자를 통해 자기 스스로를 온전히 알아갈 수 있는 기회마저 제공한다.
또 자기기만적 허위의식을 고착화시키는 문자주의 신앙의 극복은 포이어바흐가 수차례 강조한 투사의 불가피성을 수용하는 데서 가능해진다. 이는 사실성과 확실성을 추구하는 자기 믿음을 절대화해 성서에 투사했다는 점을 솔직히 시인하고 경전 우상화 포기라는 모험을 요구한다. 절대화된 신의 계시를 소유하지 못해 불안하지만 그 불안을 견뎌야 비로소 왜곡된 신 이미지를 해체하는 우상파괴를 통해 내 포켓 속에 신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과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하나님을 특정 공간에 가두는 예배당 우상화도 마찬가지다. 예배당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과 동일시하는 자기 믿음을 예배당에 투사해 예배당을 절대시 했다는 것을 시인하는 데서 예배당 우상화 타파의 지름길이 열린다. 하나님을 익숙한 공간으로 일상화시키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을 때야 비로소 왜곡된 신 이미지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과 맞닥뜨리는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또 한편으로 하나님을 우리 일상의 주변부 즉, 예배당 한 켠으로 밀어넣는게 아니라 일상의 한복판에서 만날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응급처치자 혹은 문제해결사로 우리를 만나러 오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일상의 한 가운데 이미 해결된 소소한 일상의 문제들을 재료로 삼아 우리를 만나기 원하신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