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와 묵상] 안개가 짙은들

이인기 목사(반포소망교회)

안개가 짙은들 

                                                                                                                                                   나태주

안개가 짙은들 산까지 지울 수야

어둠이 짙은들 오는 아침까지 막을 수야

안개와 어둠 속을 꿰뚫는 물소리, 새소리,

비바람 설친들 피는 꽃까지 막을 수야

시인(1945- )은 현상에 대한 과도한 염려를 벗어나도록 격려하고 있다. 시제인 <안개가 짙은들>은 현상이 염려스럽더라도 과도하게 근심할 일이 아니라고 암시한다. "안개," "어둠," "비바람"은 변화하는 상황의 한 국면일 뿐이다. 하늘이 늘 안개로 덮이거나 항상 어둡거나 언제나 비바람에 휩싸여 있지 않은 데다 대부분은 맑고 밝으며 갠 상태이다. 후자가 일상적이다 보니까 전자의 상태가 위협적으로 여겨질 수는 있어도, 그렇다고 존재의 소멸까지 상상할 일은 아니다. 안개가 아무리 짙어도 산까지 지울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눈앞에서 안개가 짙어지면 산을 보지 못하게 되기는 한다. 그래도 산을 보지 못하는 것뿐인데, 산이 없어졌다고 생각한다면 과도한 염려이다. 하지만, 막상 안개가 짙게 끼었을 때 그 너머에 산이 그대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평정심으로 통찰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래서 시인은 타이른다. "안개가 짙은들 산까지 지울 수야" 있겠는가고. 산은 능곡지변(陵谷之變)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자리에 있다. 안개가 언덕과 골짜기를 뒤바꾸지는 못한다. 산을 가려서 안 보이게 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안개와 같은 현상에 대립되는 가치로서의 산은 무엇을 가리킬까? 삶의 안정적 토대 혹은 생명의 보루일 수 있다. 안개처럼 어느 날 느닷없이 환난이 닥치더라도 삶 자체가 중단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생명 자체가 멸절한 대홍수나 전쟁의 상황이라면 모를까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게]"(창세기 8:22) 되어 있다. 창조주가 그렇게 약속하셨다. 현실의 난관이 안개처럼 눈 앞을 가려도 생명 자체를 소멸하지는 못한다. 문제는 그 현상이 유도하는 바대로 절망에 빠지는 일이다. 그러나 과도한 염려나 기우는 안개와 같고, 안개는 걷히기 마련이다. 그러면 안개 아래서도 생명이 지속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이 사실을 환기하고 있다.

그의 격려가 이어진다. "어둠이 짙은들 오는 아침까지 막을 수야" 없다. 부정의 종결어가 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생략은 사실상 단호한 부정을 전제한다. 종결어를 생략한 것은 독자가 그 공백을 스스로 채우도록 안내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밤이 아무리 깊어도 아침은 오고야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어둠이 실패를 가리킨다면, 아침은 새 출발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아무리 처참하게 실패해도 새롭게 출발할 가능성 자체가 파괴되지는 않는다. 그 가능성은 항존한다. 다만, 실패의 어두운 그늘에 갇혀 그 가능성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물론,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경우, 그 후유증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치명적인 실패를 일거에 만회하려는 시도와 새 출발을 동일시하지 않는 한, 언제든 소박하게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아침이 계속되는 이유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희망의 가능성은 항상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절망적이라도 그것이 희망의 종결을 선언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격려에는 근거가 있다. "안개와 어둠 속을 꿰뚫는 물소리, 새소리," 등이 그 근거이다.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가 찍힌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근거가 되는 소리는 그 외에도 많다. 바람소리, 웃음소리 등도 시각적 장막 너머에 생명과 희망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청각적으로 알린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소리는 존재의 증거이다. 소리는 시각적 장막을 꿰뚫고 들리므로 생명의 힘까지 전한다.

이처럼 근거가 있는 격려는 우리로 현상의 암울한 영향에 압도되지 않게 한다. "비바람 설친들 피는 꽃까지 막을 수야" 없다. 비바람은 안개와 어둠보다는 더 구체적인 난관을 가리킬 수 있는데, 그 암울한 힘이 아무리 파괴적이고 공격적이라도 결실을 맺고자 하는 의지까지 없애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비바람이 항시 몰아치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경망스럽게 설칠 뿐이다. 그 순간을 치명적으로 여기게 되면 꽃을 피우지 못하겠지만, 꽃이 핀다는 것은 비바람도 잦아들게 되어 있음을 알린다. 따라서 "안개"와 "어둠"과 "비바람"이라는 현상이 아니라 꽃을 피울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려면 해야 할 일은? 오히려 현상을 자세히 보아야 한다. 자세히 보되 현상 아래 가려져 있는 예쁜 것을 찾아야 한다. 그 아래에는 사랑스러운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그의 시 <풀꽃>에서 통찰한 그대로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안개를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 그 뒤에 산이 그대로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 자체에 주눅 들지 말 일이다. 주눅 들었다면, 그것은 현상을 자세히, 그리고 오래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상의 표면적 모습에 얼을 뺏기게 되면, 염려와 근심에 싸여 현상 아래 굴복하고 만다. 난관이 닥치더라도, 일단 그것을 죽고 사는 문제로 성급하게 연결하지 말아야 한다. 안개와 어둠이 짙어지면서 희망의 가능성까지 상실할 지경에 이르러서도 구원의 복음에 귀를 닫지는 말아야 한다. 꽃들은 봉오리가 뜯겨나갈 정도로 강한 비바람을 겪고서 피어났기 때문이다.

과도한 염려나 근심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더 많은 두려움과 불안을 유도한다.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안개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최대한 고민하거나 염려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일들은 대개 어떤 식으로든 발생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경은 과도한 염려가 여러 가지 면에서 파괴적이라고 가르친다. 더군다나, 염려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반대이다. 우리로 그릇된 방향에 집중하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염려와 근심이 완전히 무용한 것은 아니다. 유익한 근심이 왜 없겠는가? 성경은 무익한 근심 이외에 유익한 근심에 대해서도 알린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 7:10).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하려고 근심할 때 우리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가 정말로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진실로 회개할 때 그분이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멋진 계획을 갖고 계신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안개"와 "어둠"과 "비바람"으로 닥치는 현상을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서 그 현상 이면에 그분의 뜻을 찾게 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산이 되고 그 아래서 아침을 맞이하게 하며 비바람을 뚫고서 꽃을 피우게 하신다. 그 일을 기뻐하신다. 그렇다면, 자신의 안개 너머에 있는 창조의 계획과 그에 따른 사랑의 섭리를 믿으면 우리는 염려와 근심을 벗어나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된다.

※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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