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도 나처럼
복효근
심고 가꾸고 꽃을 좋아하는 내가
꽃이 많이 핀 집을 지날 때면
그 꽃을 심고 가꾼 사람이 궁금해진다
그도 나처럼
눈물이 많고 가끔 거짓말을 하고
때론 돈이 많았으면 하는 생각도 하고
가끔 예쁜 여자 생각도 하고
야한 영화를 찾아보기도 하며
전봇대 옆에 침을 뱉기도 하고
아는 것도 없으면서 괜히 알고나 있는 것처럼 으스대기도 하며
남 흉도 보고 욕도 할 것이다
꽃이 많이 핀 집 앞을 지날 때면
꽃을 하나도 가꾸지 않은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 사람을 떠올리며
꽃에 기대어 조금은 아름답고 싶은 그가
나와 함께 한없이
가엾기도 하고 턱없이 눈물겹기도 하여
오래 발길을 멈추곤 하는 것이다
시인(1962- )은 공감이 정서적 일치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승화하려는 노력이라고 정의한다. 꽃이 많이 핀 집을 지나면서 그가 떠올린 상념에 그 정의가 배여 있다. 그는 자기가 꽃을 좋아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때문에 그 꽃을 심고 가꾼 사람에 대해 관심이 일었다. 그 관심은 그가 꽃을 키우는 이유가 "그도 나처럼" 꽃과는 달리 아름답지 못한 내면을 꽃처럼 가꾸고자 하는 것임을 짐작하게 했다. 그는 그 노력이 애잔하게 여겨져서 그 집 앞에 "오래 발길을 멈추곤" 했다. 이처럼 공감은 상대방을 자기처럼 실존적 노력을 기울이는 존재로 동일시하게 하고, 그로써 인생 전반에 대한 성찰을 심화하게 한다.
그의 성찰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3대 요소를 알려준다. "심고 가꾸고 꽃을 좋아하는 내가/ 꽃이 많이 핀 집을 지날 때면/ 그 꽃을 심고 가꾼 사람이 궁금해진다." 우선, 공감은 자기분석을 전제한다. 자기 내부의 신호에 예민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처지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심고 가꾸고 꽃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꽃이 많이 핀 집을 지날 때면" 발걸음을 멈춘다. 공감은 이처럼 공상의 작용이 아니라 현실의 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특히, 자기 주변의 일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물론, 먼 나라의 사건도 공감할 수 있는데, 이는 그 사건에 대한 감성과 관련된 구체적인 경험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겪었기 때문이다. 또한, 공감은 상대방에 대해 궁금해할 때 생긴다. 그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공감하지 못한다. 궁금하기 때문에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누며 소통하다가 공감이 깊어지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공감은 자기 내부의 신호에 예민할 때, 구체적인 사건이 감성을 자극할 때, 일이나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생긴다.
이 3대 요소는 기본적으로 공감이 상대방과 자기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일이라 말한다. 공통점이란 자신의 바깥에서 또 다른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단초이다. 자신의 관심사를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했으니까 그 사람은 자기와 흡사한 존재이다. 그래서 공감은 타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도 나처럼/ 눈물이 많고 가끔 거짓말을 하고/ ... / 아는 것도 없으면서 괜히 알고나 있는 것처럼 으스대기도 하며/ 남 흉도 보고 욕도 할 것이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속마음까지 훔쳐본 듯 상상한 내용은 바로 자신의 속마음의 표현이다. 이것을 입증할 증거는 있는가? "가끔 예쁜 여자 생각도 하고/ 야한 영화를 찾아보기도 하[는]" 것은 자기만이 알고 있는 은폐된 욕망을 폭로하고 있으니 그만한 증거가 더 있을까? 그는 "그 꽃을 심고 가꾼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공통의 관심사 때문에 자기와 동일시하고 있다.
꽃이 매개가 되기는 했으나 전혀 모르는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한 것은 제3 자도 그런 속마음을 품고 있음을 암시한다. "심고 가꾸고 꽃을 좋아하는 내"와 "그 꽃을 심고 가꾼 사람"이 "꽃을 하나도 가꾸지 않은 사람"과 동질적인 존재이다. 이는 인간의 이중적 모습의 보편성을 폭로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공감은 인간폄하적 순간에 머물지 않고 꽃을 키우는 노력의 의미에로 향한다. 그 사람이 꽃을 키우는 이유가 "꽃에 기대어 조금은 아름답고 싶[어서]"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그 이유를 감지한 것은 그 또한 "조금은 아름답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꽃을 가꾸는 사람에게서 그 마음을 읽어낸 것이다. 그나 자기가 이면에서는 저속하게 사는 듯하지만, 사실은 "조금은 아름답고 싶은" 지향을 함께 품고 살고 있다. 그렇게 여기니까 그 사람이 "나와 함께 한없이/ 가엾기도 하고 턱없이 눈물겹기도 하여/ 오래 발길을 멈추곤 하는 것이다." 인간의 보편적 조건에 대한 공감은 서로를 "한없이" 가엾게 여기고 턱없이 눈물겹게 여기도록 만든다. 그런 공감은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감은 서로에게서 "조금은 아름답고 싶은" 소망을 확인하고 함께 나누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럼으로써 내가 아름다워진다. 아름다워진 나와 그 사람은 동질적이므로 그 사람도 아름다워진다. 그로써 인간존재 자체가 승화된다. 이러므로 공감은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공감도 그러하다. 하나님이 인간의 처지가 되신 것은 공감의 극한적 사례이다. 그 성육신은 그분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감행하신 일이다. 그 사랑이 육신을 입었고 육신이 겪을 모든 시험적인 상황을 그대로 감당하셨다. 그렇게 인간의 처지를 온전히 공감하셨기에 그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가교로서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15). 그분의 공감은 인간의 처지에 대한 동정에 그치지 않고 죄를 없애려는 지향도 실현한다. 그분은 인간이 그분에 "기대어 조금은 아름답고 싶은" 마음도 있음을 알고 계셨다. 그렇게 그분은 우리가 "가엾기도 하고 턱없이 눈물겹기도 하여/ 오래 발길을 멈추곤" 하셨다.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