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조선신학교 운영과 성바울교회 목회

    조선신학교 운영과 성바울교회 목회

    해방 이후에 조선신학교에 사방에서 학생들이 밀려 왔다. 송창근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학교육의 현장을 사랑하고 교육에 힘을 쏟았다. 송창근이 담당한 과목은 목회신학이었다. 그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살아 있는 강의를 했다. 당시 조선신학교에는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강원용, 장준…
  • [김흡영 칼럼] 만들어진 신?

    [김흡영 칼럼] 만들어진 신?

    얼마 전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옥스퍼드대학의 리처드 도킨스 교수의 저서가 '만들어진 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그 책은 금방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모처럼 이곳저곳에서 열띤 신학 토론이 벌어지게 하였다.
  • 광복과 조선신학교 교장 취임

    광복과 조선신학교 교장 취임

    피고인들이 보석인 상태로 진행되고 있던 수양동우회 사건이 드디어 마지막 막을 내린 것은 1941년 7월 21일이었다. 그 날 고등법원 형사부의 최종심에 의하여 ‘피고인 전원 무죄’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사건의 시작부터 조선총독부의 정치적 필요에 의한 고도의 정략에서 비롯되었고, 결말 역시 정략 …
  • [손규태 칼럼] 도덕과 정치

    [손규태 칼럼] 도덕과 정치

    최근 노무현전대통령과 그 주변 인물들이 타락한 경제인들로부터의 금품수수에 관한 검찰의 수사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왔었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노전대통령의 측근들이나 야당들은 이명박 정부가 정치보복차원에서 표적수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었고, 그의 정치적 …
  • 김천 황금정교회에서의 행복한 목회

    김천 황금정교회에서의 행복한 목회

    부산의 도시빈민선교사업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막을 내렸고, 서울에서 조선신학교 일을 볼 수도 없게 된 송창근은 1940년 초에 경북의 김천으로 옮겨갔다. 김천 황금정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이다. 김천은 경북의 한 중소도시이다. 옛날에 금이 나는 샘인 금지천(金之泉)이 있는 땅이라 해…
  • [홍정수 칼럼]목회 이야기②

    많이 미안하다, 교인들에게. 교회가, 나에게는, 늘 신학교실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목사의 역할이 뭔지 잘 모른다. 중학교 시절부터 교회를 쉼 없이 다니긴 했지만, 목사의 역할을 눈여겨 본 적 별로 없다. 내 어렸을 적, 목사는 “(서)양무당” 정도였다
  • 조선신학교 설립

    조선신학교 설립

    송창근이 충옥하고 보니 그간 시국은 더욱 많이 악화되어 있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성빈학사’는 완전히 문을 닫고 뿔뿔이 흩어져 버려서 도저히 되돌릴 수가 없는 상태였다. 나빠진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조선총독부에 의한 집요하고 잔혹한 신사참배 강요에 조선 천지가 굴복했다. 마지막…
  • [이장식 칼럼] 하나님 나라의 정치학

    [이장식 칼럼] 하나님 나라의 정치학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나라와 역사적으로 병존하면서 세상을 구원하는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간다. 예수님이 가까워졌다고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사역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사건으로 현실역사 안에서 성장하고 확장되어 왔고, 사도들과 신도들의 선교운동으로 그의 나라가 세계화되어 온 것…
  • 수양동우회 사건

    수양동우회 사건

    1937년 10월 28일 송창근 목사는 돌연 부산에서 체포되었다. 그가 부산에 내려가서 도시빈민선교사업을 시작한 지 2년째인 때였다. 그의 피체와 관련해서 당시 에는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지난 십일 오전 열시 경에 북부산경찰서 고등 형사대가 부내 초장정에 있는 성빈학사 장 신학박사 송창근 씨를 검…
  • [김흡영 칼럼] 배아는 생명인가, 세포덩어리인가?

    황우석 박사가 주도한 인간배아줄기세포연구는 세계를 놀라게 한 과학사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지만, 국제적인 망신을 당한 것으로 종결되어 버렸다. 그러나 결코 그 실패의 책임이 온통 황 박사 연구팀에게만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부, 언론, 학계 등 한국 사회 모두가 총체적으로 책…
  • 부산에 세운 성빈학사

    부산에 세운 성빈학사

    부산은 송창근에게 새로운 선교사업을 시작할 새로운 땅이었다. 새로운 각오를 지니고 그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1936년 4월 바닷바람이 싱그러운 부산에 도착한 송창근은 이내 평양에서 생각하고 계획했던 선교의 방향을 바꾸었다. 부산 나병원의 울타리 안에서 그 곳에 수용되어 있는 나환자들을 위해…
  • [홍정수 칼럼] 목회 이야기①

    [홍정수 칼럼] 목회 이야기①

    1980년대를 서울에서, 그것도 대학 캠퍼스에서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특권이었다. 경제적으로 상위 계급에 속해 있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대한민국 뉴스의 중심, 현장에 근접해 있었다는 것 때문이다.
  • 산정현교회를 떠나 부산 나병원으로

    산정현교회를 떠나 부산 나병원으로

    송창근 목사의 지도 아래 산정현교회는 날이 갈수록 부흥했다. 교인 수가 많이 늘어서 교회 건물이 비좁아졌다. 교회 건물은 한식으로 건물 내부에 여기저기 기둥이 박혀 있어서 1935년 여름 교회 신축 문제가 대두됐다. 이는 전 교인이 모두 동의하고 있었다.
  • [김진호] 필립비의 ‘악령’들린 노예소녀

    영화 (The Sixth Sense, 1999)에는 한 소년이 혼령과 대화를 한다. 소년이 공포에 휩싸인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그러나 결국 두려움 없이 혼령과 소통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공포영화다운 어법에서 벗어나 ‘성장담’의 형태를 띠고 있다. 나아가 그 소통을 통해 인간의 사회적 행위에 혼령의 언어…
  •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하다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하다

    송창근 목사가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것은 1932년 4월 상순이었다. 산정현교회는 일명 산정재교회라고도 불렸다. 현(峴)은 고개를 말하는 것이라서, 고개 ‘재’ 자를 넣어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산정현교회는 장대현교회에서 분립한 교회다. 장대현교회의 교인들이 늘어나면서 1903년 남문외교회가 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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