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치고 말을 멋있게 하는 훈련을 안 한 사람이 있을까? 말을 사용하는 지도자라면 그는 멋진 표현, 멋진 이야기를 찾거나 만들어 낸다. 하지만 말과 존재의 거리를 일치시키는 자리가 행위다. 그러므로 생긴 것이나 말보다, 그의 행위에 우리가 더 많이 주목하게 된다. 말을 앞세우며 행위가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 심지어 정반대의 행위를 하면서도 말은 잘 하는 기만적인 인간도 있다. 그러나 언행에 일치가 이루어지는 사람을 향해서는 실실한 존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2020년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가 또 꼴찌다. 천주교, 불교 다음에 기독교다. 10명 중 세 사람만 기독교를 신뢰한다. 아니 불신자의 78.2%가 기독교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니 전도도 안 된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인간의 공포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은 사이비종교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공포는 의존성을 불러오기 때문에 그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사이비 종교에 빠집니다. 또 사이비 종교는 신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자신들로부터 채워지게 만들기 위해 가족은 물론 신도들의 모든 인간관계를 단절시키고, 자신들이 제공하는 정보 외의 모든 정보도 차단시킵니다. 이렇게 해서 신도들이 의존 대상인 사이비 종교 외에는 의지할 데도 없고 행복을 느낄 수도 없도록 교단에의 의존증을 강화시킵니다. 사이비 종교의 메커니즘은 신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사이비종교로부터 채워지도록 만드는 보상독점구조를 통해 신도들의 공포를 해결해 철저하게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희생과 고난을 딛고 우리 자매들은 잘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의 오늘이 있기까지 고생을 한 분은 어머니만이 아니라 큰언니의 희생이 함께 하였다. 어머니에게 큰언니는 남편이요, 아들이요, 유일하게 자신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피난처요, 위로자였다. 장사 같은 것에 능력이 없으신 어머니를 대신하여 큰언니는 여학교를 나오자마자 곧장 어머니와 함께 가정 경제를 책임졌다. 그리고 나의 대학 생활까지 그 뒷바라지를 오히려 크나큰 즐거움으로 감당해 주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생활을 위해 자주 집을 비우셨고 어린 우리들을 다독거리며 먹을 것을 챙겨 주던 이도 큰언니였다."
"개척교회 세미나를 하고 나면 어떤 목사님들은 오히려 기가 더 죽어버립니다. "결국, 저렇게 다들 한방이 있어서 자립하고 교회를 세우셨구나" 이런 마음 때문이지요. 그러나 잘 살펴보세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교회가 성장하고 세워진 이유는 그 자리에서 보통 언급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가오가 빠지니까요."
"정경심 교수가 지인과 나눈 카톡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의식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엉! 뭐 이런 분이었어... " 하는 사람과 "민주사회에서 뭐 그런 생각도 못하냐?"라는 반응, 그리고 "봐라 이런 탐욕스러운 여자야 봤지...라고 개인의 카톡 메시지를 세상에 까발리는 검사"도 있다. 자한당 부류, 적대적 단순형은 사안을 일반화하여 탐욕스런 인간의 드러난 진면목으로 보고, 복잡형은 사안을 개인의 단순한 감정 표현으로 본다. 이 경우 비난하는 이들은 진영논리에 빠진 벌레의 견해 정도로 비하한다. 하지만 나는 검찰의 의도에 더욱 주목한다. 인간의 내면을 난도질 하고 그 인간을 가장 추악한 방식으로 재현하는 기술이다."
"가끔 우리 조국교회의 전락(轉落)과 몇 년 전 숭례문이 파괴되는 모습이 오버랩 되곤 합니다. 저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이미지는 기와들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와르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장엄하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주르르 맥없이 흘러내렸었지요. 앞으로 우리 교회가 그렇게 무너져 내릴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무너져 내리는 조국의 교회를 살리기 위한 방법이 무엇일까 늘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영락(零落)의 원인을 "광장과 골방" 이라는 틀로 짚어봅니다."
"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 교과서로 사용하기 적당한 책 중 하나인 『기독교조직신학개론』(다니엘 밀리오리 지음)의 기독론에서 저자는 십자가 사건을 폭력의 문제와 결부시켜 풀어나간다. 그래서 제목이 "폭력과 십자가"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는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압도적이다. 폭력이 동원된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죽음이 될 수 있는가? 하여 교회는 우리 삶과 세상의 활동 속에 만연된 폭력을 은폐하려는 것에서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에 가해진 폭력을 교묘하게 가장하는 것에서도 노련함을 보였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십자가 사건의 폭력성을 은폐하면서, 하나님의 값진 사랑의 메시지를 한갓 감상적인 동화나 지배의 상징으로 전락 시키거나 그것의 참된 의미를 여러 가지로 왜곡한다는 것이다."
"자유한국당과 일부 보수언론 그리고 일부 국민들의 반대가 거센 와중에 아산의 한 주민이 "고통과 절망 속에서 많이 힘드셨죠. 아산에서 편안히 쉬었다 가십시오"라고 쓴 스케치북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이후 SNS을 중심으로 '#we_are_asan' '#우한교민환영합니다' '#아산시민은환영합니다' 등 우한교민들에 대한 연대의 뜻을 표하는 '우한 교민 환영 해시태그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이 확산되자 결국 우한교민 격리수용을 반대하던 진천과 아산의 주민들도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했습니다."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가 부단한 회의와 생각을 거쳐, 존재는 생각하는 데 그 소이연(所以然)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면, 욥은 모든 소유를 빼앗기고, 자녀들도 죽고, 자신의 몸까지도 악성 종기에 시달리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주어진 재앙을 수용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불가사의한 심미적 믿음의 태도를 보여준다. 모든 육체적 고통은 지극히 작은 흔적이라도 몸의 고통이며, 고통에서는 유체이탈이 불가능하다. 모든 고통은 우선 나 자신의 것이지 너의 고통이 아니다. 고통은 고유한 것이고 유일회적이며 고통당하는 자에게 절대적이며 결정적이다. 고통은 어떤 종류의 피난도 도피도 불가능하다...고통은 가장 강렬하고 강력한 현재적 경험이다. "나는 아파(苦痛: 정신적인 苦와 육체적인 痛)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명제라고 해야 한다."
"제자 목사님이 기억하고 있는, 내가 그에게 주었다고 하는 그 세 가지 권고를 다시 곱씹어본다...자네, 왜 목사가 되려는지 생각해 보게나. 종교행상인 같은 목사들이 점점 많아지는 이때에 왜 굳이 목사가 되려고 하는지 말일세. 부르심을 받은 내용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목사의 길을 걷게 되는지 평생 마음에 되짚어 보시게나."
"왜 욥기인가? 나는 성경에서 욥기를 가장 정열적이고 아름다운 책 중 하나로 여긴다. 욥기는 가장 절박하고 가장 절실한 우리네 삶의 관심사를 가지고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관심사란 욥이 얻은 의로움과 누리는 부와 행복, 인간의 지극한 고통과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초월성, 악의 문제, 인과응보 그리고 우정, 산문과 시의 형식으로 지은 운문의 문체, 대화 형식으로 된 욥기의 문학적 형식에 이르기까지이다."
"전 목사가 말하는 "정치"를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성서와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죄가 되는 것이다. 전 목사가 말하는 정치는 세속적 권력 추구이다. 예수가 말하는 정치, 하나님 나라의 정치와는 정 반대되는 "마귀"의 정치 행태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선교초기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고, 광야로 나아간다. 도시의 광장이 아니라 광야로 나아간다. 그리고 40일 동안이나 금식 기도를 드린다. 마태복음과 (4장)과 마가복음( (1장) 그리고 누가복음 (4장) 모두 예수가 마귀의 "경제적" "정치적 유혹" 그리고 "종교적 유혹" 혹은 시험, "마귀의 도전"을 받는다."
"라브린스(Labyrinth)는 들어가면 나오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없는 미궁(迷宮) 또는 어디가 어디인지 방향을 알 수 없는 미로(迷路)를 뜻합니다. 둥글게 만들어진 꼬불꼬불한 길이 때로는 중심부로 이끌다가 이내 때로는 주변부로 이끌기를 계속하는 미로와 같은 라브린스는 조용히 명상을 하거나 기도하며 천천히 걸어서 중앙에까지 다다랐다가 다시 돌아서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종종 "춤"은 좋지 못한 느낌을 준다. "춤바람이 났다!"는 말이 그런 뜻일 게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선 춤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해왔다. 이교주의와 연계성, 성적 자극 등으로 인해 그랬다.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영육 이원론" 때문일 수도 있다. 근데 "춤"이라 하면 부정적이면서도 "댄스"라면 덜 부정적인 것은 웬일일까? 아마 서양의 "포크댄스"(folk dance)가 떠올라서일지도 모르겠다. 근데 웃기는 것은 "민속춤"이나 "민속무용"도 영어로 "포크댄스"(folk dance)라 한다. 서양 것에 대한 맹목적 동경은 아닌지 모르겠다."
종교비판에서 신앙성찰로(19):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적 통찰을 중심으로인간을 가리켜 우상 공장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만큼 우상의 마력은 인간 삶 전체에 걸쳐 뿌리 내려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상파괴가 말처럼 쉽지 않은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