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과 누가는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을 말하고 있는가?
제11장
에필로그: 결론적인 요약
4. 사도행전의 기자 누가는 UT방언을 말하고 있는가?
사도행전에서는 방언 혹은 방언과 유사한 단어가 모두 일곱 번 등장합니다. 2장에서 다섯 번, 그리고 10장과 19장에서 각 한 번씩 모두 일곱 차례 사용되었습니다(행 2:3, 행 2:4, 행 2:6, 행 2:8, 행 2:11, 행 10:45-46, 행 19:6):
(행 2:3) "마치 불의 혀(glossai, tongues)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행 2:4)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eterais glossais, other tongues)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6) "각각 자기의 방언(dialekto auton, his own language)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행 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dialekto 'emon, our own tongue)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행 2:11)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auton tais 'emeterais glossais, our tongues)로 하나님의 큰 일(ta megaleia tou theou, the wonderful works of God)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 10:45-46)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lalounton glossais, speak with tongues-KJV, speaking in tongues-NIV)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므로 방언도 하고('elaloun te glossais, spake with tongues-KJV, spoke in tongues-NIV) 예언도 하니('epropheteuon, prophesied)."
사도행전의 기자 누가는 2장 3절에서는 인간의 주요 발성기관인 혀(舌) 자체를 의미하는 단어를 복수형(glossai, tongues,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6절과 8절에서는 지방의 언어를 가리키는 단어(dialekto)를 복수형으로 사용했고, 4절과 11절에서는 언어 혹은 외국어를 가리키는 단어(glossai, glossais)를 모두 복수형으로 사용했습니다. 2장 3절("불의 혀들")을 제외하고는 여섯 번 모두 말해 본 적도 없고 배워 본 적도 없는 언어 혹은 외국어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기적적으로 말하게 된 표적으로서의 LT방언이었습니다.
오늘날 오순절 계통이나 은사주의운동 계통이나 이의 영향을 받고 있는 교회들에서 행하고 있는 방언기도 행습은 거의 모두 "글로쏠랄리아"(Glossolalia) 즉 UT방언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2장, 10장, 19장에서 방언을 언급할 때 UT방언의 의미로는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방언은 사도행전 2장에서처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speak with other tongues-KJV, speak in other tongues)이라는 표현처럼, 모두 복수형 단어만을 사용했고, 언어 혹은 외국어로서의 LT방언, 즉 "제노글로씨아"(Xenoglossia)라는 의미로만 사용했습니다.
5.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UT방언만을 말하고 있는가?
앞에서 언급했던대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방언을 "사도행전에서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에서의 방언"으로 구분하여 말하면서, 전자는 언어 혹은 외국어로서의 LT방언이고 후자는 중얼중얼하는 UT방언 기도 혹은 방언의 은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를 썼던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도 LT방언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UT방언에 대해서도 언급은 하고 있지만 LT방언을 더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방언이라는 말을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네 번, 13장에서 두 번 사용하고 있는데, 여섯 번 모두 복수형으로서 LT방언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방언이라는 낱말을 열여섯 번 사용했는데, 경우에 따라서 어떨 때는 단수형으로 그리고 어떨 때는 복수형으로 사용했습니다. 단수형(glossa, glosse, glosses, glossan 등)으로 사용했을 때에는 "대체로"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중얼중얼하는 UT방언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단수형으로 사용된 경우가 모두 여덟 번이지만, 한 번은 9절에서 단수형으로서 "혀"(舌)를 의미했고 또 한 번은 26절에서 단수형으로서 문장의 구조 상 그리고 문맥 상 "하나의 언어"(hath a tongue, 외국어)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이라는 낱말이 단수형으로서 UT방언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모두 여섯 번(2절, 4절, 13절, 14절, 19절, 27절)입니다.
KJV 영어성경에서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여섯 번 등장하는 단수형 단어 앞에 unknown("알 수 없는," "알려지지 않은," "뜻모를," "이해할 수 없는")이라는 단어가 이탤릭체 글씨로 삽입되어 있거나 혹은 괄호 속에 들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단수형 단어들을 모두 UT방언의 의미로 사용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복수형(glossai, glossais, glosson glossois 등) 낱말들을 언어·말·외국어로서의 LT방언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복수형으로 사용된 경우는 모두 여덟 번입니다. 그리고 26절에서는 문장의 구조 상 단수로 한 번 사용되었지만 그 의미는 LT방언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LT방언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모두 아홉 번입니다(5절에서 두 번, 6절, 18절, 21절, 22절, 23절, 26절, 39절).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방언이라는 말을 모두 스물두 번 사용했습니다(12장에서 네 번, 13장에서 두 번, 14장에서 열여섯 번). 12장과 13장에서 여섯 번 사용한 방언이라는 말은 모두 복수형으로서 LT방언을 의미했습니다. 14장에서 열여섯 번 사용했는데, 아홉 번 사용한 방언이라는 말은 LT방언이었고, 여섯 번 사용한 방언이라는 말은 UT방언이었습니다(그리고 한 번은 "혀"를 의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이라는 말을 모두 스물두 번 사용했는데, 여섯 번만 UT방언의 의미로 사용했고, 나머지 열다섯 번은 LT방언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성경에는 두 번의 경우(행 2:4 "다른 언어들," 고전 12:10 "방언들 통역함")를 제외하고는 방언이라는 말이 모두 단수형으로만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LT방언과 UT방언을 구별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해석 상의 오해와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희랍어 원어성경이나 영어성경들을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LT방언과 UT방언을 제대로 분별하며 성경(특히 고린도전서 14장)을 읽어야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말하고자 했던 의도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6.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성경구절들은 무엇인가?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 계통과 이러한 신학사조의 영향을 받고 있는 일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고린도전서 14장의 성경구절들을 해석하면서 LT방언과 UT방언의 차이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해석 상 적지 않은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LT방언의 의미로 한 말인데 그것을 UT방언으로 해석함으로써 본문의 원래 의미를 왜곡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UT방언 주창자들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4장 18절에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glossais, speak with tongues-KJV, speak in tongues)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말했다면서 UT방언을 옹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의미하고 있는 방언은 복수형으로서 LT방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중얼중얼하는 UT방언기도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언어 혹은 외국어인 LT방언을 많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중해 연안의 여러 지역들을 다니면서 다양한 언어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교회의 어느 성도들보다 LT방언을 더 많이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22a절에서 "그러므로 방언(glossai, tongues-KJV, NIV)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라고 말했을 때에도 복수형 단어로서 LT방언을 의미했습니다. 외국인 불신자들에게 외국어 방언 즉 LT방언으로 복음을 증거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이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어서 그것이 기적적인 표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이라는 말을 사도 바울이 했을 때에는, 방언이란 복음전도를 위한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는 말(언어) 혹은 외국어로서의 LT방언을 의미했습니다. 중얼중얼하는 UT방언 기도 속에는 불신자들이 듣고 이해하고 결단할 수 있는 복음전도의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고 했는데, 복음의 메시지가 들어 있는 LT방언을 듣거나 그 LT방언이 통역이 되어야, 그 메시지를 듣는 불신자들이 복음을 듣고 마음문을 열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결단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UT방언을 들어서는 그들에게 믿음이 생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4장 39절에서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lalein glossais, speak in tongues-KJV, speak in tongues-NIV)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고 말했을 때에도 그는 LT방언을 의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수형 단어를 써서 예수님과 누가가 사용했던 동일한 LT방언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UT방언 주창자들은 사도 바울이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했다면서 UT방언 중지론자들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인간으로부터 연유한 UT방언은 기독교역사 상 언제나 있어 왔고 오늘날에도 UT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의 신앙행습들 속에서도 UT방언기도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LT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제대로 통역이 된다면, 계시적 기능 즉 예언과 같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4장 19절에서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glosse, in an unknown tongue-KJV, in a tongue-NIV)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진술했을 때에는, "일만 마디"(ten thousand words)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면서도 방언이라는 말을 단수형(glosse)으로 썼는데, 그것은 UT방언을 의미했습니다. 일만 마디 UT방언 기도로 소리를 낸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는 의미있는 메시지가 없기 때문에,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그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UT방언의 무가치성과 무익성을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서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했는데, 여기서 사용된 방언이라는 낱말은 단수형(glosse, an unknown tongue-KJV, a tongue-NIV)으로서 UT방언입니다. 이 구절에서 앞 부분은 가정법입니다. "내가 (실제로는 UT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지만) 만일 UT방언으로 기도한다면"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영이 기도한다"는 말을 결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의 영이 기도한다"는 말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는 말처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표현입니다. 그래서 바로 다음 절인 15절에서 그는 자신의 의지를 천명(闡明)하고 있습니다. "나는(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나는(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과 마음이 합치된 상태, 쉽게 말해서 제 정신으로 자신이 사용하는 정상적인 언어로 기도하고 찬송하겠다고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UT방언을 언급은 하고 있지만 그는 그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은사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누가와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로서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방언(glossai, glossais, speaking in tongues)이란 "제노글로씨아"(Xenoglossia), 즉 복음의 메시지를 증거하는 기적적인 특별한 은사인 언어 혹은 외국어로서의 LT방언만을 의미했습니다. UT방언은 그 당시 고린도 지역의 신전(神殿)들에서 행해지던 이교적인 신앙행습이요 이방인들의 기도관행이었고, 그것으로 인해서 문제 많았던 고린도교회가 격심한 혼란과 무질서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날의 UT방언 주창자들처럼 UT방언을 권장하거나 독려했던 것이 아니라, UT방언으로 말미암은 폐해를 막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12-14장을 썼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썼던 기원후(AD) 54년경에는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예언(預言, prophecy)은 성도들과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가르쳐주는 은사로서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의 서론과 결론에서 예언을 사모할 것을 강조했습니다(고전 14:1, 14:39). LT방언도 그것이 제대로 통역이 된다면 예언과 유사한 기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방언(LT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UT방언은 그러한 계시적인 기능(revelatory function)을 전혀 할 수 없었고, 오히려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騷音)이어서 고린도교회를 혼란과 무질서에 빠뜨린 주요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을 쓴 가장 중요한 목적이 바로 예언을 사모하라는 것이었고, LT방언은 반드시 통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통역이 된다면 "방언(LT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LT방언도 제대로 통역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해지게 된다면, UT방언처럼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교회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리게 될 위험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UT방언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정상적인 인어로 통역이 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교회를 세우는데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안정과 질서의 회복을 위해서 UT방언은 고린도교회로부터 당연히 퇴출이 되어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암시하였습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고전 12:2)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UT방언 행습은 고린도교회의 일부 교인들이 한 때 몸 담았었던 이방종교(밀교, mystery religion)나 미신종교(superstitious religion)의 옛 신앙행습이었습니다. 그러한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한 일부 교인들이 중얼중얼 소리를 내며 기도하면서 고린도교회를 혼란과 무질서에 빠뜨렸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러한 혼란과 무질서로부터 고린도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쓴 서신들이 바로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였습니다.
오늘날의 UT방언 주창자들은 UT방언도 고린도전서가 말하고 있는 또 다른 성서적인 방언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혼란의 주요인이라고 보았던 UT방언을, 그들이 부추기고 권장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울 사도의 마음과 의도를 전혀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UT방언은 마치 위조지폐(counterfeit notes)와도 같은 위조방언(counterfeit tongue) 혹은 가짜방언(fake tongue)으로서 성령의 은사로조차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어 혹은 외국어인 LT방언만이 참 성서적인 방언이지만, 이것도 통역이 되지 않은 채 서로 경쟁하듯이 무질서하게 말한다면, 주위 사람들이 "너희들 모두 미쳤구나"(고전 14:23)라는 말을 하며 시험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LT방언도 그러할진대 통역될 수 없는 UT방언으로 중얼중얼하며 큰 소리를 낸다면 그 결과는 어떠하겠느냐고 힐문(詰問)했던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와 후서 그리고 디도서 등의 목회서신들에서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들(목회자들, 장로들과 감독들, 딤전 3:1-7, 딛 1:5-9)과 평신도지도자들(안수집사들, 딤전 3:8-13)의 자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들의 자격요건으로서 UT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씀이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UT방언 주창자들은 UT방언의 유익성(고전 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을 매우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UT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목회서신들에서 교회지도자들이 성령뱁티즘을 받아야 한다든지 UT방언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든지 하는 말씀을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결국 알아들을 수 없는 비인격적인 소리(unintelligible impersonal voice)로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인격적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인격적인 대화와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필자는 UT방언 기도로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교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면서 내는 발성(發聲)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알아들으실 수 있을까요? 그것이 진정 "하늘의 언어," "천국 시민권자의 언어"일까요? 일만마디 UT방언으로 "허공에다 말하는 것"(고전 14:9, speak into the air-KJV, NIV)이 진정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화와 교제가 될 수 있을까요?
Grace Community Church(Sun Valley, CA)를 개척하여 목회 및 강해설교 사역에 헌신해 왔고 The Master's Seminary를 설립해 목회자들을 배출하고 있는 존 맥아더 목사(John MacArthur, Jr.)는 자신의 최근 저서 「존 맥아더의 다른 불」(Strange Fire), 제7장 "거짓 방언에 현혹되지 말라: 위험한 체험"에서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마가복음, 사도행전, 고린도전서를 중심으로 방언의 은사를 언급한 성경구절들을 살펴보면서 현대 은사주의의 방언(UT방언-필자 주)이 모든 점에서 거짓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참된 방언(LT방언-필자 주)은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말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복음의 메시지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교회에서 방언(LT방언-필자 주)을 사용할 때에는 반드시 통역을 통해 그 메시지로 다른 사람들의 덕을 세워야 했다.[John MacArthur, 「존 맥아더의 다른 불」(Strange Fire), 220-1.].
그와는 대조적으로 현대 은사주의의 방언(UT방언-필자 주)은 통역할 수 없는 뜻 모를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학습된 행동으로 인간이 사용하는 실제 언어와 아무런 유사점도 없다. 오늘날의 은사주의자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수단으로 방언을 사용하기는커녕, 자기만족을 위해 사사로운 "방언기도"를 날조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듯한 느낌을 준다는 이유로 방언기도를 정당화하지만, 성경은 그런 식의 뜻 모를 소리를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그들의 방언은 거룩하게 하는 능력도 없고, 거짓 영성을 자극해 교만을 부추긴다. 현대의 방언(UT방언-필자 주)이 이교도들의 종교의식과 유사하다는 사실은, 이 비성경적인 행위가 초래할 영적인 위험을 강력히 경고하고 있다.[Ibid., 221.].
사도 바울은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예언이 LT방언보다도 더 탁월한 은사라고 주장을 하며 "예언 말하기를 사모하라"(고전 14:39a)고 권면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LT방언에도 계시적인 기능(revelatory function)이 있을 수 있기에, 그것이 올바르게 통역만 된다면 예언과 유사한 기능을 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LT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b)고 권면했습니다. 예언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권장"(positive encouragement)의 의미로, LT방언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허용"(passive permission)의 의미로 권면을 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결코 UT방언을 금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성경적인 성령의 은사로조차 간주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고 명령하면서 고린도전서 14장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