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와 묵상] 불혹

이인기 목사(반포소망교회)

불혹(不惑), 혹은 부록(附錄)

                                                                                                                                              강윤후

마흔 살을 불혹이라던가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부록으로 들린다 어쩌면 나는

마흔 살 너머로 이어진 세월을

본책에 덧붙는 부록 정도로

여기는지 모른다

삶의 목차는 이미 끝났는데

부록처럼 남은 세월이 있어

덤으로 사는 기분이다

봄이 온다

권말부록이든 별책부록이든

부록에서 맞는 첫 봄이다

목련꽃 근처에서 괜히

머뭇대는 바람처럼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겠다

시인(1962- )은 동음이의어인 '불혹'과 '부록'의 언어유희를 통해서 혹함이 없는 인생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인생을 책으로 본다면, 마흔 살까지가 본책에 해당하고 그 이후는 부록일 수 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혹함이 없게 되었으니 그 이후는 덤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부록 같은 삶도 본책의 부속편이 아니라 그 연장일 가능성을 섣불리 차단할 필요는 없다. 본책과 부록은 그 심상이 활성과 비활성으로 대비되는데, 그렇게 심상을 고정하여 불혹과 그 이후의 인생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불혹 이후의 삶도 본책처럼 살 때 부록에서도 본책의 모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흔 살 이후의 세월을 부록처럼 보는 사람에게나 그 세월이 부록이다. 왜냐하면, 그 이후에도 봄이 와서 역동의 시간이 이어지므로 그러한 자연의 속성조차 단절적인 시각으로 보면 그에게는 봄도 겨울과 같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마흔 살을 불혹이라 부르는 관행을 염두에 두고 어느 날 인생 전반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마흔 살을 불혹이라던가." 불혹의 명칭에 실린 인생의 의미는 음미해볼 만하다. 공자가 『논어』(論語) <위정편(為政篇)>에서 자기가 40세의 시절에 불혹에 이르렀다고 쓴 데서 그 명칭이 통용되었다. 그런데 마흔 살에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서 마음에 의혹이 일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려면 공자만한 공력(功力)을 쌓아야 가능하지 않을까? 불혹이라는 명칭은 마흔 살이면 무조건 불혹의 경지에 달해야 한다고 이르는 듯하여 수련이 공자에 미치지 못하는 대부분의 범인에게는 부담스럽다. 게다가 오늘날 마음을 닦는 학문조차도 평생 궁구해야 할 과제를 계속 제기하는 상황에 세상의 이치를 마흔 살에 통달한다는 것은 약간 시대착오적인 냄새도 난다. 공자가 그의 시대에 불혹의 경지를 마흔 살에 달한 경험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기대나 목표의 차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마흔 살에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그 이후의 세월은 덤일 수 있다.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부록으로 들린다." 불혹이 부록과 같은 삶의 시작 지점인 듯 들린다. "어쩌면 나는/ 마흔 살 너머로 이어진 세월을/ 본책에 덧붙는 부록 정도로/ 여기는지 모른다." 부록은 "본책에 덧붙는" 부분이므로 인생의 본령에서 비켜 나와 있어서 부차적이거나 쇠락하는 부면을 연상시킨다. 마흔 살이 인생의 정점인 셈이다. "삶의 목차는 이미 끝났는데/ 부록처럼 남은 세월이 있어/ 덤으로 사는 기분이다." 인생이라 규정할 만한 치열한 기억들을 목차로 정리한 후라면 그 뒤에 다가올 세월이 덤이기는 하겠다.

그렇다면, 시인은 과거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일 수 있다. 과거의 기억을 본책으로 여기고 이후의 삶을 부록으로 예단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다가올 시간을 살아보지 않았으면서 부록을 운운하는 것은 이전에 살아왔던 자세로 그 시간을 미리 규정하는 행위이다. 불혹이라는 명칭의 영향이다. 그러나 관행적인 명칭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을 뿐 그가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그의 상념이 "여기는지 모른다," 그리고 "기분이다"라고 추정적으로 표현되고 있지 않은가? 여하튼, 그는 마흔 살이 된 시점에 불혹의 의미대로 아무것에도 혹하지 않을 경지에 이르렀는지를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에도 혹하지 않을 세월을 살아가야 한다면 그 자체가 겨울 속을 사는 것이 아닌가? 그도 봄의 의미를 알고 있다. 그는 "봄이 온다"고 느낀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의 표명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작은 "부록처럼 남은 세월"도 본책과 같을 수 있다고 기대하게 한다. 그는 마흔 살이 되는 해에 첫 봄을 맞으며 새로운 시작의 기대를 품는다. "권말부록이든 별책부록이든/ 부록에서 맞는 첫 봄이다." 이때 관행적인 사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세월이 어떤 부록처럼 보이든 상관없이 "첫 봄"이 중요하다. 새로운 시작은 설레게 하기 때문이다. 불혹과 관련하여 공자가 유혹의 부정적 측면을 염두에 둔 반면에, 시인은 생명의 역동성을 거론하고 있다. 그는 괜한 기대라도 그 자체가 삶을 역동적으로 만들 것이라 믿고 있다. "목련꽃 근처에서 괜히/ 머뭇대는 바람처럼/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겠다." 불혹이 목련꽃 근처에서 머뭇대는 바람에도 감응하지 못하는 상태라면 그 자체가 부록이다. 기대가 없으면 미지의 세월은 영적 나태로 이어지게 된다.

한편, 혹함이 없는 마음은 평화롭다. 불혹의 경지는 마음의 평안을 전제한다. 혹함이 없으니 욕망의 예봉도 꺾이고 갈등도 줄어든다. 마치 세상의 이치를 통달하여 관조하는 경지에 든 듯 보인다. 누구든 선망할 경지이다. 그런데 사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의혹이 없어질 때는 이 세상에 종언을 고할 때가 아닐까? 공자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에서 이상적인 군자의 덕목으로서 '지혜로운 사람은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知者不惑)라고 말했는데 그는 불혹에 무슨 지혜를 깨달아 알았을까? 역동적이지 않은 불혹의 삶이 부록과 같다는 사실을 안 것일까?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난 뒤에 오십 세에 이르러 천명을 알게 된다(知天命)면 그 천명은 세상의 이치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오십 세에 깨달은 천명이 세상의 이치와 다를 가능성은 없는가? 만일 오십 세에 이런 의문을 품는다면 그 사람은 사십 세에 불혹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셈인가? 혹함으로 갈등을 겪으면서 새롭게 깨달아가는 역동성은 본책의 일부가 될 수는 없는 것인가?

사실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런 의혹 혹은 기대가 삶의 동력이자 증거이다. 그것이 없으면 마흔 살 이전에도 인생은 부록의 상태로 떨어진다. 의혹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의혹이 없으면 의욕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의혹 혹은 기대가 이끈다. 신앙적인 용어로 번역하면, 열정과 소망이다. 하나님께 대한 열정과 소망으로 그분을 알아가는 과정이 신앙생활에서 목계지덕(木鷄之德)의 경지로 이어진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영적 나태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상태가 신앙을 부록으로 만든다. 덤으로 여기며 살면 신앙도 인생도 덤이 되고 만다. 그런 모습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한탄하신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세아 4:6).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에 대해 궁금해하며 그분의 은혜를 소망함으로써 생명의 지식을 쌓아가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우리에게 계속 봄을 보내시는 이유이다.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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