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사랑
황인숙
내 어릴 때 교실 창문
살며시 들여다
보시던 어머니
비 내리면 우산 들고
마중 나와
서 계시던 어머니
명절 때는 예쁜 옷 입히고
배불리 먹이시던
내가 어머니 되어
떠 올리니 그 사랑은
오색 무지개이어라
시인(1958- )은 어머니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면서 그 사랑의 속성을 알려주고 있다. 그 속성들은 여러 범주가 있을 수 있는데, 그녀는 집사 노릇을 염두에 두고 있다. 집사란 빈틈없이 자애롭게 돌보는 역할을 연상시킨다. 그녀에게 어머니는 그런 집사였다. 어머니는 그녀가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될 때까지 돌보셨다. "배불리 먹이시던"과 "내가 어머니 되어" 사이의 논리적 간극에 어머니가 충실한 집사처럼 돌보는 행위들이 무색 잉크로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아마도 1940년경에 양주동(梁柱東) 작시, 이흥렬(李興烈) 작곡으로 만들어진 <어머니의 마음>의 가사와 흡사할 것이다.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 어려선 안고 업고 얼러 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이 유사성이 어머니의 사랑의 속성을 확인한다. 자식을 낳는 사실만을 제외하면 충실한 집사의 돌보는 행위가 어머니의 사랑의 성격을 대변한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어머니의 집사 노릇은 정신적 성장의 영역에서부터 시작된다. "내 어릴 때 교실 창문/ 살며시 들여다/ 보시던 어머니." 어릴 때는 누구나 배워야 한다. 정신적으로 성장해야 사리를 분별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로써 인간성을 갖추게 되니까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과정을 "살며서 들여다/ 보[신다]." 교육에 관한 한, 그녀는 자신이 집사인 줄 아시는 것이다. 그 집사는 자식이 잘못하는지를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잘할 것을 기대하며 정서적으로 지지한다. 이 일은 시인이 어릴 때 어느 날 한 번 있었을 수 있지만, 기억에 선명히 떠오를 만큼 강한 인상을 주었고 그로써 어머니란 그녀를 곁에서 지켜보며 지지하는 역할의 심상을 갖게 했다.
집사 노릇은 위기나 고난의 시기에 더욱 빛난다. "비 내리면 우산 들고/ 마중 나와/ 서 계시던 어머니." 하굣길에 비가 내리면 속수무책으로 맞을 수밖에 없다. 교사 출구에서 안절부절하고 있을 찰나에 아이들 머리 너머에서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자식과 눈을 맞추시는 어머니. 그 순간의 안도감은 마치 위기를 예견하여 자기희생으로 대비책을 마련한 존재가 출현한 때와 흡사할 것이다. 그녀는 먼 길을 마다하고 빗속을 종종걸음으로 달려왔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룩주룩 내리는 비 속에서 그녀는 비를 하나도 맞지 않은 모습이다. 뽀송한 치마 쪽으로 자식을 끌어들이며 비를 잊어버리게 했던 경험은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자식을 보호하려는 모성애를 확인하게 했다. 그것은 자식에게 위기나 고난을 대하는 담력을 길러주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시절이나 행사를 불문하고 집사이다. "명절 때는 예쁜 옷 입히고/ 배불리 먹이시[셨다]." 명절 때 예쁜 옷을 입힌다는 것은 평시에도 옷을 갖추어 입혔던 이력을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명절 때 배불리 먹이신 것 또한 평시에도 챙겨 먹였음을 알린다.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특별한 날이라고 한다는 것은 집사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없었던 일을 급조해서 가장해야 할 경우가 있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시인이 "배불리 먹이시던"에서 행을 멈춘 데서 그 의혹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멈춘 뒤에 생략된 공간에 그와 흡사한 무수한 사례들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라고 노래를 불러도 그 헌신에는 이의가 제기되지 않는다. "배불리 먹이시던"은 한 행 뒤 "그 사랑은"에 연결된다.
이처럼 어머니는 혼신을 바쳐 집사 노릇을 하셨다. 교육과 위기관리와 양육을 책임지며 결국 자식으로 어머니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어머니로 만들었으니까 집사 노릇을 완수한 셈이다. 완수의 경지는 혼신을 바쳤을 때 도달할 수 있다. 혼신을 바쳤다는 증거는 어머니가 된 자식이 그 헌신을 사랑이라 판정한 것이다. "내가 어머니 되어/ 떠올리니 그 사랑은/ 오색 무지개이어라." 그 사랑이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무지개로 하늘에 걸렸으니 그 이상의 완성의 경지가 없다. "내가 어머니 되어" 그 자리에 서 보니까 어머니의 집사 노릇은 지성(至誠)을 바쳐 감천(感天)함으로써 자식으로 어머니가 되게 했음을 깨닫게 했다.
과연 사랑은 어머니를 통해서 그 증거와 효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지 않는가? 이 속담의 진실성을 어머니가 확인시킨다. 사랑이 가장 빛날 때는 상대가 무력하여 사랑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보답을 할 수 없을 때이다. 그때 자기의 소원을 상대방에게 투영하며 은밀하게 대리만족을 꾀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머니는 "살며시 들여다/ 보[기만]" 하신다. 자식이 꿈을 키워가도록 지켜보며 후견인으로서 지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면 후견인의 자리를 박차고 갑자기 초인적 영웅이 되신다. 그렇다고 이름이 나지 않을 일상적인 봉사를 도외시하지도 않으신다. 이처럼 자애롭고 충직한 집사 노릇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자식은 어머니가 되어 자신의 어머니의 사랑을 하늘의 것으로 승화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집사 노릇을 하신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그분은 우리가 무력하여 구원에 대해 아무런 조처나 보답을 할 수 없을 때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대속의 사역을 이루셨다. 이러한 초월적인 헌신에다 우리의 고난과 필요에 관해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이사야 14:24)고 약속하며 도움을 베푸신다. 그리고 그런 도움을 우리가 죽기까지 지속하며 평생 동반자로서 함께하신다. 물론, 그 과정에 "살며시 들여다/ 보시[며]" 우리가 주체적으로 판단하며 살도록 지지하신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오색 무지개로 평가할 만한 식견을 갖도록 성장하게 된다. 그분의 집사 노릇은 과연 어머니의 사랑처럼 오색찬란하다.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