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는 신학자 정재현의 저서 《'묻지마 믿음' 그리고 물음》을 소개합니다. 책 한 권 전체가 기독교인들의 믿음에 대하여 정면으로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냥 묻지 않고 조목조목 곧 육하원칙에 따라 무엇, 왜, 어떻게, 누가, 언제, 어디서의 형식을 가지고 묻습니다. 믿음이 이토록 해체된 것을 어쩌면 처음 마주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묻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물음과 더불어 성찰을 도모합니다. 성찰의 지점이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물음이 있었기에 성찰이 가능했습니다.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들뢰즈, 로지 브라이도티다. 하이데거는 현대적 주체 이해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들뢰즈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하이데거를 넘어서려 하였다. 브라이도티는 들뢰즈 논의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주체론 정립을 시도했다. 우리 시대 주체 이해의 좌표는 어디쯤일까. 저마다 각각의 주체 이해를 가지고 살아갈 것이며, 그것이 고중세적 주체든 근세적 주체든 현대적 주체든 간에 부단히 씨름하고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미래 주체를 앞당겨 고심한다. 우리에게 도래하고 있는 미래의 주체가 어떠할지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겠으나, 인문학적 과학적 실존적 모든 자료들과 상상력을 가지고 주체의 길을 모색을 시도해보는 것은 필요한 작업이다.
그리스도인 철학자 강영안 박사가 『생각한다는 것: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기』를 최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강 박사는 그리스도인의 '생각'을 여러 각도로 접근한다. 그는 철학자답게 생각이라는 인간의 기초적이면서도 근본적인 행위를 중시한다. 다만 모든 이들이 하고 있고 알고 있는 '생각'이라는 행위를 그가 굳이 '그리스도인의 생각' 곧 '신앙'과 연결지어 책을 낸 이유 중 하나에는, 아마도 한국교회 한쪽에 자리잡고 있는 '묻지마 믿음'식의 문화도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강 박사는 "생각하고 반성하고 따져 보고 물어보는 태도가 믿음과 반대되거나 믿음에 해롭다고 생각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믿음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행위가 생각 없이, 물음 없이 정말 가능할까요?"라고 묻는다. 교회 안에서 '믿음'이 마치 '그 어떤 물음과 의심도 허용하지 않고 일단 믿고 보는' 식의 얕은 이해가 알게모르게 자리잡고 있음을 그는 지적한다.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연합신학대학원이 영국의 대학평가기관 QS의 신학/종교학 분야에서 세계41위, 국내1위에 랭크되었습니다. 관련 소식입니다.
중세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스콜라주의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콜라주의 문헌들은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것을 읽거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사제 그룹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그리스가 중심지가 되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 사망 이후 신학의 중심은 알프스산맥의 북쪽 지역으로 옮겨진다. 한편 이 시기의 동방신학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서방신학은 동방신학보다는 출발이 좀 늦었으나 곧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교부들이 주축이 되어 착실하게 발전해갔다. 동방교회가 신비주의적 경향 속에서 형이상학적 교리 등에 치중할 때 서방교회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 등 보다 실질적 문제들을 다루면서 발전했다. 초대교회의 서방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한다."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의 신학을 오늘날 살피는 것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이들의 신학은 현실적이고 참여적이고 실존적이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 박해의 한 복판에서 교회의 정체성과 역할을 고민하며 교회론을 정립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교의학적 개념들을 많이 만들어낸 교부로 유명한데 한편으로는 인간의 죄와 구원의 문제를 깊이 고심했고, 키프리아누스는 교회 박해의 한 복판에서 교회의 정체성과 역할을 고민하며 교회론을 정립했다."
동방교회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함께 안디옥 학파도 있었다. 그러나 이 두 학파의 결은 사뭇 다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안디옥에서 처음 생겼다. 안디옥 학파는 당시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비해 인정받지 못했지만, 현대에 와서 재평가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 가운데서 배양되었다. 당시 철학은 단순한 학문의 한 분과가 아니었다. 폴 틸리히는 "고대가 끝날 무렵, 그리스 철학은 종교가 되었고, 종교는 신비주의적 철학이 되어 있었다"고 밝힌다. 당시 철학은 종교적 태도를 전제하거나 내포하고 있었다.
"초기 교회는 크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누어진다. 동방교회는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디옥과 소아시아, 콘스탄티노플까지 지역을 이르고, 서방교회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쪽 지역이다. 교회가 어느 정도 규모에 이르자 이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도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 문화, 철학, 관점들이 모이면서 여러 입장과 관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구약성서의 창조신앙은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 직접적인 근거이다. 구약성서의 창조 이야기를 단순하게 진리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이 기록의 구성을 살피거나 내용이 가지는 의미를 천착해볼 수도 있다. 앞의 글에서 본 바와 같이,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이야기는 P 문서와 J 문서 자료를 사용하였다. 여러 자료를 사용하였어도 전체적으로 일맥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가운데, 다양한 표상들이 사용되어 다양한 측면들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창조 이야기를 기록한 기록자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내용들을 기록하였을까?
신약성서의 창조신앙은 구약성서의 창조신앙을 전제한다. 구약신앙의 창조신앙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소중한 기록이다. 구약성서에서 창조에 관한 기록은 창세기 1장과 2장이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2장 4절까지는 창조주의 6일간의 창조와 7일째 안식의 서사가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2장 4절부터는 또 다른 창조의 기록이 시작된다. 이 두 기록의 결은 사뭇 다르다.
예수는 어느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성장 과정을 통과하며 자랐다. 어느 시점에 이르렀을 때 예수는 오랫동안 생각해오고 준비해왔던 일을 시작한다. 제자들을 모아 작은 공동체를 만들었고, 그들과 함께 다니며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한다. 그 소식은 오로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는데, 기존의 종교인들이 전하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특히 무거운 의무를 부과했던 율법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일상적인 용어로 여러 가지를 가르치셨는데, 듣고 있으면 누구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소망이 마음에 일어났다. 그는 가르치는 것을 넘어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심지어는 부정한 여인이나 이방인들과도 교제하였다.
"코로나19 기간, 한국에서 문 닫은 교회는 전체 교회의 15% 정도나 된다.... 2050년에는 한국 사회가 이단과 무신론자의 나라가 되는 최악의 미래를 맞을 수 있다." 신학과 더불어 미래학을 전공한 최윤식 박사가 최근 펴낸 『2050 한국교회 다시 일어선다』에는 위와 같은 경고문이 있다.
[시와 묵상] 새벽 편지"시인(1954- )은 밤과 아침의 경계에 서서 "존재의 순간"(the moment of being)을 경험한다. 그 순간에는 비존재(non-being)의 장막이 걷히고 존재의 영역인 빛과 생명과 깨달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