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익숙하고 친숙하다. 구약 선지자들이 신의 뜻을 전달하면 백성들은 들었고, 예수의 가르침에도 따르는 자들은 귀를 기울였다. 개신교도 듣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예배는 사실상 설교 중심이고, 참석자들은 대부분의 예배 시간에서 '듣는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근거한 '말씀의 신학'을 펼쳤는데, 한국의 장로교나 감리교는 바르트가 그의 신학에서 전하는 메시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은 중요하다. 성경에서 신은 인간에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말을 통해 그 자신을 드러내신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였고, 복음서에서는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타종교에서도 말은 중요하다. 고등종교들에는 경전이 확립되어 있고, 경전의 해석과 실천이 신앙의 핵심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는 '말이 곧 하나님'(요1:1)이라고 한다. 이 부분이 타종교와의 결정적 차이다.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형성하는가? 양명수 교수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논문에서 그 뜻을 밝히는 작업을 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해진 지 이제 14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국교회는 그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공동체성이다. 물론 공동체성은 어떤 집단에도 존재한다. 그런데 한국이라는 토양은 서양의 개인주의 문화에 비해 집단주의적인 성격이 보다 강하고, 여기에 한국인들의 종교적 열정까지 더해져, 한국교회의 공동체성은 다른 나라와 차별성을 갖게 되었다. 이 공동체성을 비판적으로 접근해보면 우리는 '교회주의'에 이른다.
기독교는 한 분 하나님을 믿음과 더불어 '삼위일체'를 말한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을 말한다. 삼위일체는 신약 이후의 교회에서 나온 신관이다. 하나님을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 말할 수도 있지만,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는 특별한 뜻이 있다. 양명수 교수가 그의 논문 〈한국 기독교의 특징에 관한 신학적, 철학적 고찰〉에서 이 내용을 한국교회의 권위주의적인 현실과 엮어 다루었다. 살피면 아래와 같다.
이상적인 종교를 생각하라고 하면 흔히 '무소유'를 떠올린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종교는 그렇지 않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만이라도 물질은 필요하기에, 교회가 소유로부터 아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요한복음서에 등장하는 니고데모는 '예수의 영적 메시지를 알아듣지 못한 유대의 지도자'로 종종 회자된다. 요한복음서 3장이 전하는 사건은 이렇다. 유대의 선생이자 산헤드린 의회의 의원이었던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를 찾아간다. 예수를 '선생'이라 칭하며, 예수가 행한 표적에 대한 놀라움을 표시한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알리신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난다'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여 "사람이 어떻게 다시 어머니의 배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혜암신학연구소의 연구 저널 《신학과 교회》 제18호(2022, 겨울)에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박사의 논문이 실려 이목을 끈다. 이 저널의 특집 주제는 '민중신학에 대한 성찰과 전망'이다. 한국의 대표적 토착화 신학인 민중신학에 대하여 몰트만 박사는 "민중신학의 그때와 오늘"이라는 주제의 연구논문을 기고했다.
서울대학교종교문제연구소 우혜란의 「신종교로서 무종교(Nonreligion)」 논문이 이 문제와 관련하여 생각할 담론을 던지고 있기에, 논문 일부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논문의 제목은 '무종교'를 '신종교'로 상정하고 있다. 무종교가 신종교가 되려면 무종교는 종교적이어야 하는데, 무종교는 종교적인 것인가? 무종교가 종교적인 것이라 했을 때, 무종교는 신종교인가?
혜암신학연구소(소장 김균진 박사)의 정기간행 연구지 《신학과 교회》 제18호(2022년 겨울)가 발행되었다. 이번 호의 주제는 "민중신학에 대한 성찰과 전망"이다. 2022년은 민중신학의 개척자 안병무 선생의 탄생 100주기인 해이기도 하였다. 연구지에는 7편의 국내 연구자들의 논문과, 독일 위르겐 몰트만 박사의 특별기고 논문을 포함한 2편의 독일 신학자들의 논문이 실렸다.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 신학계에 등장했고, 세계에서 한국 고유의 신학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국내에서 민중신학은 비교적 소수의 학자들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민중신학의 태동기에 비해 오늘날 한국은 사회적으로는 민주화의 수준이 높아졌고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선진국 대열에 속한다. 때문에 당시 '민중'의 형태가 오늘날에 그대로 존재하지는 않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현재를 산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와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 현재가 과거는 아니지만, 과거의 토대 위에 현재가 전개되고 있다. 또 미래가 현재에 인과론적 영향을 준 바는 없지만, 미래를 보는 시각에 따라 현재의 양식이 결정된다. 현재에 살면서 한쪽을 등한시할 수 없다. 과거를 잊으면 같은 실수가 되풀이되고, 미래를 생각지 않으면 진보가 없다.
"저자는 근현대 이르러 인간본성이나 인간현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크게 보면 3가지 흐름이 있다고 요약한다. 그 3가지 흐름은 크게 보아서 도킨스가 대표하는 유물론 철학을 바탕에 깐 '유전자 결정론'이 가장 최근의 흐름이다. 그 바로 직전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롯한 사회과학적 입장인데 인간성은 정치경제적 영향을 받고 결정적으로 구성된다는 '사회관계 결정론'이다. 그리고, 세 번째 흐름은 칼 야스퍼스 등이 대표하듯이 인간의 자유의지 결단과 선택을 중시하는 '실존론적 결정론'이다. 저자는 위에서 언급한 근현대 3가지 종류의 인간성 이해들이 모두 편향적이고 독단적임을 비판하고 통전적 인간이해가 요청된다고 강조한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은 좀 다르다. 우리는 사실상 절대가 상대화된 세계에 살고 있다. 오랜 시간 전통을 떠받쳐오던 절대적 원인들, 인간 현존의 필연성들이 우리 시대에는 희미해졌다. 우리 시대는 전통적 의미가 상실되었고, 무의함의 불안이 인간을 덮친다. 틸리히는 밝히기를, 죽음의 불안과 죄의식의 불안은 "우리를 위협하기는 하지만 우리를 소멸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의심과 의미함의 불안은 "의미와 확실성"을 모두 삼키고, "진리도 사라지"게 한다. 진리도 의심이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삶의 도처에 죽음의 불안, 무의미함의 불안, 정죄의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삶을 지속할 용기를 냈다. 역사 이래 역사는 끊긴 적이 없다. 틸리히는 용기를 "비존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자기 긍정"이라고 정의했다. 죽음, 절망, 죄의식의 위협 가운데서도 자기를 긍정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자아, 즉 자기 자신이다. 틸리히가 말하는 자아의 자기 긍정은, 단지 윤리적 혹은 이성적 긍정이 아닌, 저 심부로부터 저 심연에까지 이르는, '존재론적인 자기 긍정'이다. 그리고 비존재의 살벌한 위협 가운데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이 용기를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라 하였다.
일상에도 용기가 필요한 시대다. 불안과 절망이 없었던 시기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우리 시대 현대인들이 떠안은 불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다. 그래서 다양한 '용기'의 담론들이 나온다. '세계'는 물론 '너'에 대해서도 용기가 필요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이 시점에서 폴 틸리히의 명저 《존재의 용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현대의 초입, 절망과 상실의 시대를 살과 뼈로 겪으며, 비존재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을 용기를 구하고자 했다. 그가 길어올린 것이 '존재의 용기'이다.
신앙과 이데올로기는 서로를 경계하지만, 교차 될 가능성을 저변에 가지고 있다. 이데올로기가 인정하든 부인하든 간에, 이데올로기도 신앙과 같이 '믿음'을 전제적으로 가지고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과 이데올로기'를 학문적 언어로 변환하면 '신학과 사회학'으로도 읽을 수 있다. 신학의 기반은 신앙이고, 이데올로기의 전제조건은 사회이다. 이 주제에 대하여 관심있는 이들에게 존 밀뱅크(John Milbank)의 《신학과 사회이론》(Theology and Social Theory)을 소개한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신학과 사회이론의 관계를 고찰한다. 그런데 양자의 관계를 보는 저자의 시각이 대담하다. 근대 이후 신앙이 사사화되었고 기존 교회의 전통적 권위는 과학과 실증주의에 내주게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19세기 이후 신학은 과거의 '영광스러웠던' 자리와는 거리가 영 멀어졌다. 저자는 이에 대해 신학이 "세속 이성에 의해 '자리매김'" 되었다라고 갈파했다.
[시와 묵상] 버팀목에 대하여"시인(1962- )은 부모와 이웃의 숨겨진 덕을 기리고 있다. 그들의 구체적인 덕행을 읊고 있지는 않으나 그들의 존재 자체가 현재를 "싹 틔우고 꽃 피우[게]" 했다는 사실.. |
""무신론자", "반기독자"(Antichrist)로 알려진 니체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유대인 문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