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빈슨은 틸리히의 주장을 받아들여 초자연적 하나님 개념을 확실히 거부했다. 초자연주의적 신 이해는 신을 자연 위에, '더 높은 곳'에 모시는 표현인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신을 오히려 자연과 비교선상에 놓아, 오히려 인간이 신을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되게 하기도 한다. '신 존재 증명' 시도도 그러한 면이 있다. 그러면 이제 현대인들이 신에 대하여 초자연적 이해도 버리고 신화적 용어도 버린다면, 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로빈슨은 "초월"(transcendence)을 붙든다. 초월은 '뛰어넘음' 혹은 '넘어있음'이다. 초자연은 자연을 넘어있는 것이지만, 초월은 그저 자연만을 넘어있는 것이 아니다. 로빈슨은 초월에 대한 이해, 그리고 초월과 인간 사이 관계의 이해를 틸리히의 한 설교에서 발견하여 소개한다.
19세기 철학은 종교에 대하여 혁명적이었다. "신은 투사다"라고 하거나 "신은 죽었다"고 했고,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했다. 이 도전의 물결에서 20세기 신학은 쇄신을 꾀했다. 기존의 전통적 신관이나 종교성을 새로운 시대의 관점으로 보았고, 정당한 의문들을 제기했다. 자신들이 맞닥뜨린 시대와 도래하는 시대에서 신, 예수, 종교가 궁극적인 의미를 유지하게 하는 데에 책임의식을 가졌다. 영국 성공회 주교 존 로빈슨(John A. T. Robinson, 1919-1983)은 ...
17세기 일본의 교회 박해는 절정에 달했다. 교회 당국도 사제들의 일본 선교를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이 와중에 열정적인 젊은 사제들은 일본 입국을 꾀했다. 예수회 소속 오드리고 신부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어렵게 상부의 승낙을 받아 일본으로 밀항했다. 오드리고 신부 안에는 두 가지 마음이 있었다. 하나는 일본을 향한 순수한 선교의 마음이요, 두 번째는 자신의 스승 페레이라의 배교 소식을 믿을 수 없어 직접 확인하고픈 마음이었다...엔도 슈사쿠 소설 『침묵』 속의 오드리고 신부의 절망감을 우리 시대 신앙인들이 깊이 공감하긴 어렵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사회에서 누구도 배교를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페레이라 신부가 경험했던 '침묵'의 상황, 오드리고 신부 앞에 놓인 '침묵'의 상황은 우리에게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쏟아지는 신학 논문과 교회 설교와 기독교 문화컨텐츠 가운데서도 우리는 분명히 '내가 찾는 하나님'이 '안보이는 상황'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기독교를 보는 새로운 관점의 하나로 "세계기독교"(World Christianity)라는 패러다임이 선교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다. "세계기독교"라는 개념은 아직 한국 교회에서는 보편화되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한복판에서 선교 일선에 있거나 선교를 연구한다면, 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우리 시대 교회를 과거의 패러다임으로만 해석하고 그 틀에 안주하면 교회는 '현재'를 놓치고 있는 형국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루터의 이 입장은 중세교회의 회개의 성례전을 상대화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당시 사회는 크리스텐돔이었고 신자들은 교회의 권위와 전통 이외의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때문에 교회의 신자들에게 교회의 성레전들은 절대적인 것이었고, 죄책감으로 인한 불안은 성례전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했는데, 루터의 95개조 정신은 이것을 와해시키고 있다. 루터는 더 나아가 교황의 권위와 권한도 재고한다. 당시 교회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말씀을 교황에게 적용하여,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하였다. 이에 성경에 없는 개념인 연옥이나 면죄부도 교황의 승인 아래 공식적인 것이 되었다. 루터는 이런 상황에서 교황이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 용서하심을 교황은 "선언하고 증명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마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기 바로 전 달인 9월 4일에 "스콜라 신학을 반대하는 변론"을 발표했다. 그는 자신이 스콜라 철학에 반대함을 명백하게 밝힌다. 루터는 스콜라 철학의 어떤 부분에 대하여 반대하였는가? 김균진은 루터가 "스콜라 신학의 구원론을 거부한다"고 밝힌다. 중세 말기 스콜라 철학에 영향을 준 사상으로 반(半)펠라기우스주의가 있다. 반펠라기우스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타락하였지만, 그럼에도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지와 자유의 능력"이 남아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자연적 능력으로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먼저 사랑할 수 있고...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에 협동할 수 있고, 구원의 은혜를 상으로 받을 수 있다." 즉 인간의 의지와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와 '협동'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인간의 행위가 구원에 주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시발점은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던 때로 이의 없이 동의된다. 그런데 분명히 루터 이전에도 존 위클리프나 얀 후스와 같은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이 있었고, 이들도 교황의 우상화를 비판하였고 성경을 번역하여 읽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인물로 우리는 루터를 꼽는다. 폴 틸리히는 루터에 대하여 "로마 체제를 뚫고 나가는데 성공한 인물"이고, "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 돌파를 감행했던 것은 오직 한 사람 루터"였다고 말했다.
혹 기독교인들이 '왜 신을 제한하고 인간에만 집중하는가, 그러면 진정한 인간 탐구가 불가하다'라고 발끈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인간다움에 대한 충분한 숙고가 없는 사람이 왜곡된 종교적 신념에 도취되어 비인간적인 행위들을 저지르는 일들을 종종 목격한다. 왜곡된 신과의 관계에 도취되어 신앙은 있으나 도덕이 없는 상태에 이른다. 이런 부족한 글에 이름을 올리기조차 미안한 어린 영혼들, 정인이와 시우를 죽음에 직접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계모와 부친은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다. 소위 가나안성도나 플로우팅성도가 아닌, 교회 내에서 열심을 보이는 이들이었다. 우리는 얼치기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하여 숙고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아편이라는 비판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리게 된다.
폴 틸리히는 20세기 실존주의 대표적 철학자로 사르트르와 하이데거를 꼽았다. 사르트르와 하이데거는 이른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이다. 이때 이들의 무신론은 신의 존재유무가 전혀 아니다. 이들은 단지 실존에 고도로 집중을 할 뿐이다. 어떻게 보면 실존에 집중하기 위하여 신을 제쳐놓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실존에 집중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실존에 집중하고자 했을 때 왜 신을 제쳐놓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을까.
하나님의 희망과 인간의 선이 합쳐졌더라면 역사는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희망과 인간의 죄가 합쳐져 역사는 굴곡지다. 때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계신데 왜 역사가 이렇게까지 힘겨워야 하는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성서가 전하는 하나님을 살펴보면, 창조하신 에덴동산을 아낌없이 첫 사람에게 주셨지만 그들의 모든 행위들을 통제하진 않으셨다. 선악과 사건 이후 이치에 따라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나가라고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을 보호하시려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얼마 후 그들의 자손들이 싸워 형이 아우를 쳤는데, 그 아우가 하나님의 전능으로 살아나는 기적은 없었다. 하나님은 살인한 형이 극도로 불안해하자 그를 지키시려는 요량으로 '표'를 주셨다. 세월이 더 흘러 세대가 타락하자 하나님은 후회를 하시며 40일간의 홍수를 일으키셨다. 그리고 다시는 이
"기미년 삼일운동 104주년을 맞아 그 때 조상들의 희생과 독립선언문 정신을 되새기면서, 우리는 남강 이승훈 선생을 다시 마음 깊이 생각하고 그의 정신을 계승해 가야 한다. 필자는 남강 선생에 대하여 그동안 이 위대한 인물에 대하여 너무 몰랐다는 자책감을 느꼈고 크게 회개하였다. 지금 시대 한국인 대부분도 삼일운동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유관순, 안중근, 손병희, 김구 선생들이지 남강 이승훈에 대하여 너무나 모른다. 남강 선생은 그동안 가리워져 있었다."
칸트가 말하는 인간도 낙관적이고 긍정적이다. 칸트의 순수한 실천이성에서 사람이 사람다운 존재가 되려면 사람은 정언명령에 따라 오직 법칙에 대한 존중심에서 행위해야 한다. 그런데 이 의로운 행위는 개인의 행복이나 즐거움과는 별개의 문제이고, 정의로운 행위가 행복을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착하게 산 사람의 인생의 인생이 반드시 행복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은 우리도 실존에서 삶에서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기본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인데, 행복은 어디서 보상을 받는가?
따지고 보면 근세의 휴머니즘은 중세의 교회중심사회 자체를 모태로 한다. 그런데 기존의 종교문화적 억압에 대한 반작용이 강했던 탓인지 근세의 휴머니즘은 신이 없는 휴머니즘이 되었다. 양명수 교수는 근세 휴머니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바라보지 않음)하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중시했다."
그리스도교가 믿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면서 말이신 하나님이다. 로고스는 성자를 통해 육화되어, 사람과 함께 하셨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지만 성자는 사람과 같이 계셨고, 성령은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우리와의 비연속성과 연속성을 동시에 본다.
이번 칼럼은 박재순의 『인성교육의 철학과 방법』이라는 역저의 후반부 내용을 독자반응 형식으로 소개하려 한다. 최근 한국사회는 무엇인가 근본적 문제에 봉착했다는 위기감을 많은 시민들이 느끼고 있다. 물론 정치계의 권력투쟁, 기업과 가정의 경제문제 위기와 곤경, 사회계층 간의 갈등, 남북관계의 냉기류 등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문제의 밑바닥에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근본적으로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사회"라는 위기감이다. 사람다움 곧 인성(人性)을 상실한 사회가 되었고, 냉혹하고 이기적이며 배타적인 기류가 너무 강해졌다는 위기감이다. 이대로 나아간다면 우리 사회가 자멸하거나 해체되거나 붕괴될 위험마저 있다는 위기감이 점점 증대되고 있다.
[시와 묵상] 버팀목에 대하여"시인(1962- )은 부모와 이웃의 숨겨진 덕을 기리고 있다. 그들의 구체적인 덕행을 읊고 있지는 않으나 그들의 존재 자체가 현재를 "싹 틔우고 꽃 피우[게]" 했다는 사실.. |
""무신론자", "반기독자"(Antichrist)로 알려진 니체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유대인 문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