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 나가지 않는 기러기 아빠의 일상은 단조롭기 그지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생활이 엉망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규칙적인 일상의 일환으로 매일 동네 뒷산에 올랐습니다. 늘 다니던 길을 다니다가 조금 지루해지면 또 다른 길을 개척하고, 그렇게 또 다니다가 지루해지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 이런 식으로 산책을 다니자 동네 뒷산은 제게 매일 새로운 얼굴을 선보여 주었습니다. 자주 만나는 화사(花蛇)나 가끔 보는 살모사는 친한 친구처럼 느껴졌습니다. 때론 거대한 고라니 수컷도 만났습니다. 어떤 때는 누구에겐가 살해당한 고라니 새끼의 사체도 보고, 작고 귀여운 쇠딱따구리, 물총새 등도 쉽게 만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산을 즐기며 동네 뒷산을 다니는 시간이 1시간에서 2시간, 2시간에서 3시간으로 계속해서 늘어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사고는 매우 간단했습니다. 물잡이 고기들의 적응력에 놀란 저의 가슴이 진정되기도 전에 그들은 제게 질긴 DNA전승 집착을 보여주었습니다. 꼬물대는 것들은 연체동물이 아닌 소드테일의 새끼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저는 치어 사육통을 사러 대형양판점으로 뛰어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의 행동이 즉흥적이고 본능적일 뿐 사려 깊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육통을 사들고 집에 돌아와서 새끼들을 격리하자마자 이런 질문이 저의 뇌리를 때렸습니다. “건강하게 다 자라면 어쩔건데?”
아주 오래 전에 들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땅이 바다보다 낮은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한 소년이 학교에서 돌아오다 바다를 막아 놓은 댐 한 구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물이 새는 구멍을 막고 있었는데 수압에 의하여 구멍이 점점 커져가면서 소년은 자신의 팔을 집어넣어 물을 막아야만 했습니다. 늦은 저녁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소년의 부모가 그를 발견하고 보니 소년은 댐에 팔을 넣고 잠들어 있었다는 겁니다. 그 후 소년은 저체온증으로 죽었대나, 살았대나, 뭐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이 이야기가 뻥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씁쓸한 미소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재 네덜란드 그 지역엔 소년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물론 제가 직접 가본 것은 아닙니다. 여하튼 이 이야기는 한 소년의 희생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친구 Y는 직업군인이셨던 아버님 슬하의 5남매 중 막내였습니다. 형제가 많아서인지 그는 부모님의 제재를 별로 받지 않고 초등학생으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행동반경과 자기영역을 갖고 있었습니다. 공부하고는 담을 쌓았던 그는 대담한 성격에다 용기까지 대단하여 늘 새로운 탐험을 즐기곤 했습니다. 그런 그가 어린아이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곳까지 가서 물고기들을 잡아 오곤 했는데 우리는 그의 물고기 사냥 무용담을 들으면서, 그리고 그의 작은 어항에 있는 소위 “태극붕어”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침을 질질 흘리며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작은 몸에 길게 나풀거리는 지느러미를 가진 태극붕어는 경이롭게도 윗 지느러미에 선명한 태극마크를 달고 있었습니다. 쉰이 넘어 민물고기를 키우기 시작한 이 후에서야 저는 이 태극붕어의 정식 이름이 버들붕어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버들붕어가 태극마크를 선명하게 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또 한 가지, 지금도 어린 그와 내가 그 먼 곳까지 어떻게 그렇게 자주 다녔었는지 저 조차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여하튼 친구 Y는 초등학생이었던 제게 늘 부러운 존재였습니다.
피난처가 되어 준 팜플로나 알베르게의 환대와 풍성함의 은택은 우리를 새롭게 하였다. 씻음의 정결함과 채움의 풍족함이 우리에게 내적인 안식과 친절한 위로를 베풀어준다. 오후 6시가 다 되어 팜플로나 골목길에 나섰다. 아직도 날씨는 후끈하다. 저녁 먹을거리도 그렇고 내일 여정 중에 공급할 일용양식을 준비해야 했다. 부를라다 도로 끝에서 올려다 보이던 산타마리아교회가 바로 옆 골목에 있다. 아름답다. 14세기 나바라의 군주였던 카를로스 엘 노블레와 그의 아내 레오노르가 영원히 기도하는 모습의 석조상으로 산타마리아교회 내부에 누워 있다고 한다.
‘탕.’ 요란한 폭죽소리가 아침 공기를 가르고 귀청을 뒤흔든다.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육중한 철문이 좌우로 열려진다. 리워야단 같은 콧김을 내뿜으며, 강인한 두 뿔을 좌우 날개 벌리듯이 내민 분노한 소들이 뛰어 나온다. 검은 녀석, 짙은 갈색, 얼룩진 것 등 그 기세가 심히 위협적인 황소들 십여 마리가 팜플로나의 골목길을 거침없이 질주한다. 뜨거운 여름, 매년 7월 6일, 일주일간의 산 페르민 축제가 시작된다. 하얀 셔츠와 빨간 머플러를 목에 감은 차림으로 축제를 즐기려는 젊음들이 소 떼와 함께 뛴다. 황소들이 돌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지축을 흔들고, 황소의 뿔을 피하려는 사람, 그 뿔을 잡아 보려는 사람, 그 괴이한 광경을 지켜보려고 발코니마다 매달린 사람들의 탄성과 환호성이 좁은 골목길 안에 가득하다.
아내의 하소연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힘들어요. 아파요. 고통스러워요.” 심지어, “죽겠어요.” 한다. 나와서는 안 될 말까지 나온 것이다. 해줄 수 있는 말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사발디카Zabaldika를 빠져 나오면서 135번 국도와 교차하고 도로 오른쪽 경사길을 따라 십 여리 쯤 가야 내리막길이 나온다. 팜플로나 도시 풍경이 저 너머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들어온다.
북쪽 멀리로는 산악지대, 남쪽으로는 비옥한 곡창지대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위쪽에는 구불구불한 아르가 강이 생명수를 공급하는 동시에 외적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는 천혜의 ‘해자’가 되어주는 도시가 팜플로나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의하면, BC 75년 율리우스 케사르의 정적 폼페이우스가 로마에 대항한 반란군을 정벌하기 위해 세운 도시로 소개되고 있다. 무어인과 샤를마뉴의 격돌, 스페인과 프랑스 간 전쟁 등의 소용돌이가 이 도시에서 계속되었다. 예수회의 설립자인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1521년 프랑스군을 맞아 팜플로나 요새를 방어하던 중에 포탄을 맞고 다리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후, 로욜라 성에서 요양하면서 자신의 죄를 깨닫는 영적인 각성의 시기를 맞이한다. 이냐시오는 자신의 삶을 순례로 비유하면서 그의 자서전을 통해 “명성을 얻으려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군사훈련을 큰 기쁨으로 생각하며 허영에 빠진 사람” 이었다고 고백하고, 내면으로 신비한 순례의 여정을 떠난다.
죽은 줄로 알았던 아들 요셉을 만나기 위해 이집트에 간 늙은 야곱은 파라오 앞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창47:9)” 세상 떠돌던 나그네 길이 험악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인생이 무겁고, 힘들고, 짜증이 나며, 악한 일들과 고생과 걱정이 심했다는 것을 말함이다. 많이 틀린 말은 아닌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 이처럼 험악한 일들만 가득하다면 우리의 나그네 길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지만 순례의 여정 가운데 우리는 사랑의 천사를 수도 없이 만난다.
까미노 길 가에 늘어선 검은색 산딸기(Ronce)를 몇 개씩 따먹는 재미가 참 쏠쏠하다. 어릴적 간식거리가 많지 않던 때, 한 여름철 동무들과 마을을 온통 헤집으며 뛰어놀다가 산딸기를 따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우리의 산딸기는 속살이 들여다 보일만큼 빨갛고 앙증맞다. 어떤 것은 잘 익어서 거무스름한 빛깔을 나타내는 것도 있지만, 산딸기를 한움큼 따면 손바닥은 빨갛게 물이 든다. 그마저 철이 조금이라도 지나면, 사람들의 손길에 남아나지 않는다. 땀이 바짝 난 더위에 산딸기 고것 몇 개만 입에 넣고 오물거려도, 그 시큼하고 달콤한 청량감은 한량없는 것이어서 어느덧 등줄기 흘러내린 땀을 말리기에 충분하다. 누가 그렇게 열매를 따갔는지 우리가 그것을 찾을 때면 넉넉한 수확을 거둘 수가 없었다.
언젠가 장로회신대 조직신학 교수인 김 모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청소년시절 청교도 신앙과 정신을 어마어마한 것으로 생각하다가 대학 영문과에 들어갔는데 한 교수가 청교도 정신이 영문학을 쇠퇴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설명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금욕과 절제와 검약을 강조하는 청교도주의자들에게 예술과 미학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화려했던 르네상스나 바로크의 예술과 비교할 때 대단히 소박하고 단순하게 보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개신교회를 예술의 교묘한 거세자라고 말하는데, 개신교 안에도 세계를 부정하거나 반예술적이지 않은 흐름들도 있지만 17세기 영국의 크롬웰 공화국 시대에 예술에 대하여 대단히 강력하게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청교도신앙의 세상 문화에 대한 비타협과 검약을 계승한 관계로 예술과 문화에 대해, 그리고 감각과 감각의 향유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성향이 지배적이다.
프라하는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도시다. 시의 주요 길목에 그를 기리는 기념물이 서 있는가 하면, 기념품 상점에서는 그의 얼굴이 들어간 엽서와 티셔츠를 흔히 볼 수 있다. 카프카의 이름을 딴 카페도 성업 중이다. 또 그의 작품은 서점마다 한 가득씩 진열돼 독자들을 기다린다. 한편 후배 문인들은 ‘카프카 소사이어티’를 결성하고 그의 작품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복기해내는 활동을 수행중이다. 독일 출신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귄터 그라스, 이스라엘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아모스 오즈 등도 이 단체 회원이다.
사회적 변혁기에 갈등은 불가피하다. 이런 갈등이 종교적 신념과 결합되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번진다. 30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30년 전쟁’이 바로 그런 경우다.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신교의 영향력은 확대일로에 있었고, 이에 비례해 로마 교황청의 권위는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신흥 세력인 신교와 기존 기득권 세력인 구교는 자주 알력을 드러냈고, 이런 알력이 기나긴 전쟁으로 비화된 것이다.
‘성지(聖地)’란 낱말의 사전적 정의는 ‘각 종교에서 신성시하는 도시 혹은 지역’이다. 이 같은 정의를 따른다면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의 성지다. 프라하를 이렇게 정의하는 게 비약일수도 있다. 프라하는 특정 종교의 성지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얀 후스(1372년?~1415년)는 프라하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개혁사상을 발전시켰다. 한편 신교와 구교의 알력이 전쟁으로 비화된 사건인 30년 전쟁도 프라하에서 촉발됐다. 이렇게 보면 프라하는 개신교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지이기는 하다.
루터에게 제사장 직분의 바른 수행은 말씀의 선포에 있다. 말씀 선포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선포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업적과 삶과 말씀에 대한 지식을 처세를 위하여 역사적 사실로만 설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힘주어 말한다. 훌륭한 설교자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수립되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당신과 나를 위한 그리스도가 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역이 우리 가운데 효과가 나타나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설교되어져야 한다. 설교자는 “왜 그리스도가 오셨고 무엇을 그가 가져오시고 주셨으며 또한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되는가 하는 것”을 설교해야 한다.[루터, 중에서]
종교비판에서 신앙성찰로(19):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적 통찰을 중심으로인간을 가리켜 우상 공장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만큼 우상의 마력은 인간 삶 전체에 걸쳐 뿌리 내려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상파괴가 말처럼 쉽지 않은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