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의 차원에서 투사된 신의 도덕적 완전성에서 인간은 자기 확인을 통해 종교적 만족을 누리려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또 다른 소외였다. 적어도 지성의 차원에서 투사된 신은 그의 영원성이나 전능성을 인간에게 닮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인간과 신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지의 차원에서 투사된 신의 도덕적 완전성은 인간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러한 요구 혹은 명령은 인간에게 율법으로까지 의식되기에 이른다."
"숨가쁜 2018년 한해를 넘기고 2019년 2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북미회담이 재개되었으나, 미국 대표단 강경파인 불턴이란 트럼프 대통령 보좌관의 방해로 결렬되고 말았다. 그리고 김정은은 중단되었던, 핵무기 개발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2020년 6월 16일에는 2018년 판문점 남북정상의 공동성몀으로 개설되었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김여정의 명령으로 폭파하고 말았다. 휴전선 남쪽에서 미국 달러와 북한을 악선전하는 "대북전단"을 풍선에 띄어 날려보내는 "적대행위"에 대한 반발로 자행한 분노의 격렬한 표시였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해, 그리고 금강산 개방 20주년이 되는 해 가을, 관광객 박왕자씨가 북한 총격에 사망하자, 금강산 관광사업은 페지되었다. 이어서, 2010년 3월에는 서해를 순항중이던 대한민국 해군 "천안함"이 북한 잠수함 어뢰의 공격을 받아, 해군 장병들이 전사했고 함정은 큰 피해를 보는 참사가 있었다. 그러는 동안 2011년에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69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그의 둘째 아들인 김정은이 그 자리를 세습하였다. 당시 김정은의 나이 27세였다."
"88선언"이 발표된 이후, 소문에 따르면, 정보부는 "88선언" 기초 위원 전원을 일망타진할 목적으로 면밀히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며칠 후의 일관된 조사 보고는 "문제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였다고 한다. 오히려 유신헌법 철폐 이후 개헌을 통해 청와대를 찾이한 노태우 전권의 통일부장관은 기초위원들을 불려 드려 "88선언"에 대한 취지와 목적, 그리고 내용에 대한 설명을 통일부의 실, 국장 앞에서 하도록 하고, 깊이 있는 질의응답과 토론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진지하고, 깊이 있는 "평화통일 정책 토론회"였다.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의 정식 명칭인 한국 에큐메니칼 기독교회의 "평화 통일 백서"이다. "88선언"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부총무 격인 오재식 선교교육원 원장이 본인과 나를 포함한 9명의 기초위원이 경찰과 정보부의 눈을 피해 다니면서 기초한 문서이다.
인간의 본질을 의식으로 규정한 포이어바흐는 인간 정신의 요소를 지성, 의지, 감정으로 나누어 살피면서 인간이 신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요소들에 입각해 일련의 투사 과정을 전개해 왔음을 드러낸다. 종교와 연관된 인류의 정신문화사를 합리주의와 의지주의 그리고 신비주의라는 구도로 살필 때 이러한 구도들이 더는 줄일 수 없는 인간 정신의 세 가지 요소, 즉 지성, 의지,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드러내는 예리한 분석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정신의 요소들 간에는 밀고 당기는 밀당의 관계가 성립하는데 그래서 어느 한쪽의 요소로 환원되면서 왜곡이 발생하는 과정을 불가피하게 겪어 왔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포이어바흐는 신과 인간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신이란 결국 인간의 자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이기에 시공간이란 제약된 조건 하에 살아가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동경하며 그려낸 환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신과 인간이란 따지고 보면 인간 자신과 자신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데 마치 신을 초인간적인 것으로 혹은 인간 외적인 것으로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에 포이어바흐는 문법구조, 즉 주술관계에 의심을 품고 이를 전복시키는 작업을 통해 신을 초인간인적으로 만드는 인간의 욕망의 정체를 폭로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미증유 재난 속에 한국 개신교회는 정부 당국의 비대면예배 지침에 따라 사상 초유로 예배당에서의 대면예배가 아닌 유튜브 등 방송 매체를 활용한 디지털 예배, 즉 비대면예배를 드리고 있다. 유행의 정도에 따라 예배당 출석 인원이 제한되고 완화되기를 반복하자 어느 교회는 선제적으로 비대면예배로 전환하는가 하면 또 다른 교회는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당국의 대면예배 지침의 집행정지 가처분을 신청하며 저항하기도 한다. 사태가 장기화되자 대면예배 강경파가 나와 정부의 방역 지침을 어겨가며 대면예배를 강행하는데 이들 중 일부는 온라인 예배자들을 일종의 배교자로 취급하며 정죄하기까지 한다.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만이 유일하고 참된 예배이며 온라인 예배는 참되지 않은 임시적인 예배이자 불완전한 예배에 불과하다는 의식이 이들의 종교적 심성에 똬리를 틀고 있기에 그렇다.
"사도 바울이 제시한 이상의 원칙들과 오늘날의 UT방언 주창자들이 행하고 있는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기본적으로 의미 있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UT방언은 통역하여 전달할 메시지가 없기 때문에 통역 자체가 무의미하고 또한 불가능합니다. 중얼중얼하는 뜻모를 UT방언을 소리내어 놓고 그것을 한국말로 통역하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발설한다면, 그것은 곧 성경 밖의 계속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 beyond the Bible)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한 UT방언에 대한 통역은 통역의 은사를 가졌다는 사람들에따라 통역의 내용이 동일하지 않고 모두 다를 것입니다. UT방언 통역은 얼마든지 순진한 청취자들을 속이거나 혼란케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전 14:28a)고 훈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방언은 말하는 것이지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한다"(speak)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뜻과 의미가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참 방언은 LT방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 방언입니다. 특히 구원받아야 할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큰 일" 즉 복음의 메시지를 다른 언어나 외국어로 말하는 기적적인 은사가 바로 성경적인 방언, 즉 LT방언입니다. 기도하면서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중얼거리는 뜻 없는 소리는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는 것을 영어로는 gibberish, babble, mutter, mumbo-jumbo 등의 단어로 표현합니다. 전지하신 하나님도 그러한 소리의 의미를 알아들으실 수 없습니다. 그러한 소리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화나 교제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UT방언 기도에는 의미 있는 대화의 메시지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대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방언을 "사도행전에서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에서의 방언"으로 구분하여 말하면서, 전자는 언어 혹은 외국어로서의 LT방언이고 후자는 중얼중얼하는 UT방언 기도 혹은 방언의 은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를 썼던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도 LT방언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UT방언에 대해서도 언급은 하고 있지만 LT방언을 더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방언이라는 말을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네 번, 13장에서 두 번 사용하고 있는데, 여섯 번 모두 복수형으로서 LT방언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방언에 대해 말씀하셨는가? 제자들에게 UT방언으로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는가? 예수님은 복음서들에서 오직 한번만 방언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필자는 드레이퍼 박사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것도 UT방언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만 언급이 되어 있고, 여기서 방언이라는 낱말이 16번 등장하지만 단지 6번만 UT방언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UT방언을 인정하거나 그것의 활용을 격려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말미암는 폐해를 지적하면서 비꼬는 투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인격적인 존재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맨 정신으로 정상적인 언어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리고 고린도교회에 분명하게 존재했던 방언의 은사가 왜 오늘은 없다고 하는가에 대해 궁금하다면, 오늘날 교회에 왜 사도와 선지자가 없는지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교회 창설을 위해 세우셨던 은사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계시가 있다고 믿는 자들은 그러면 지금도 계속 성경이 쓰여지고 있다는 말인지를 곱씹어 볼 일이다. 만일 그렇게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단이다. 기록된 66권의 성경 외에 다른 성경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명백한 이단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이라는 표현에서는,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스스로 선지자임을 자처하면서 예언을 하거나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는 것을 자랑하면서 스스로를 신령한 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언급되어 있는 "거짓 사도, 속이는 일꾼(궤휼의 역군), 자칭 그리스도의 사도, 광명의 천사, 사탄의 일꾼"(고후 11:13-15) 등으로 묘사된 사람들이, UT방언 기도를 하며 영적인 우월감을 과시하고 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자들을 향해서 사도 바울은 엄중한 경고를 내리고 있습니다
종교비판에서 신앙성찰로(19):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적 통찰을 중심으로인간을 가리켜 우상 공장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만큼 우상의 마력은 인간 삶 전체에 걸쳐 뿌리 내려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상파괴가 말처럼 쉽지 않은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