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에게 희망을 두셨다. 그렇기에 인간을 "대상"으로만 보지 않으시고 "상대"하였다. 인간의 주체성은 여기서 나온다. 하나님이 인간을 상대하셨기에, 하나님은 인간을 "겪으셨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지만, 인간을 조물주 마음대로 조종되게 하지 않으셨다. 인간은 자유의지, 창조성, 이성, 감성, 영성을 부여받았다. 하나님이 한낱 대상이 아닌, '그래도 주체'인 인간을 상대하신 역사를 성경 기자들은 전한다.
하나님의 희망과 인간의 선이 합쳐졌더라면 역사는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희망과 인간의 죄가 합쳐져 역사는 굴곡지다. 때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계신데 왜 역사가 이렇게까지 힘겨워야 하는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성서가 전하는 하나님을 살펴보면, 창조하신 에덴동산을 아낌없이 첫 사람에게 주셨지만 그들의 모든 행위들을 통제하진 않으셨다. 선악과 사건 이후 이치에 따라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나가라고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을 보호하시려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얼마 후 그들의 자손들이 싸워 형이 아우를 쳤는데, 그 아우가 하나님의 전능으로 살아나는 기적은 없었다. 하나님은 살인한 형이 극도로 불안해하자 그를 지키시려는 요량으로 '표'를 주셨다. 세월이 더 흘러 세대가 타락하자 하나님은 후회를 하시며 40일간의 홍수를 일으키셨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식의 홍수를 일으키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시고 무지개를 그 징표라고 하셨다. 구약의 이같은 사건들은 우리에게 인간의 죄적 모습과 이를 상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계속됨을 보여준다.
그런데 신약에 이르면 역사는 또 다른 장으로 들어선다. 신약에서의 하나님,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격을 안긴다. 성자는 수난을 받으셨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전능한 하나님과 수난받으시는 하나님의 충돌"이 일어난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우리는 수난받으시는 하나님, 힘없으신 하나님의 절정을 본다. 그런데 하나님의 수난은 사실 십자가 사건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계속 있었고 있다고 양명수 교수는 밝힌다: "하나님의 수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단 한 번 일어난 것이 아니다....그 전에도 그 후에도... 하나님의 수난은 계속된다." 아니, 전능하신 하나님의 수난은 왜 역사에서 계속되는가?
하나님의 수난은 하나님의 속썩음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희망을 두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밝힌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에게 아무 희망을 두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하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인간을 겪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에게 희망 가지기를 중지하지 않으셨다. 인간의 죄가 반복됨에도 인간에 대한 희망이 철폐되지 않았다. 저자는 하나님의 수난이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희망이 합쳐져" 발생한다고 말했다가, 바로 뒤이어 "사람의 죄보다 하나님의 희망이 더욱 뿌리 깊어 하나님의 수난이 발생한다"라고 밝힌다. 하나님의 수난은, 그러니까 하나님의 힘없으심은, 인간의 반복되는 죄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 더 뿌리깊은 하나님이 인간에 두신 희망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수난을 "하나님의 속썩음"이라고 다시 표현했다.
하나님의 속을 썩게 하는 것은 인간의 죄다. 죄의 근원은 악이다. 저자는 악이 "실체가 아니라 사람의 의지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사람이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그 의지는 자유의지에 기인한다. 그리고 자유의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죄지을 가능성을 차단하지 않으시는가?
저자는 이에 대해 "악의 가능성은 은총"이라고 대담하게 말한다. 악의 가능성은 어떻게 인간에게 저주가 아니라 은총이 되는가? 죄지을 가능성을 가진 인간은,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가능성을 뒤로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선의 의지를 발휘할 수 있다. 선과 악의 문제가 거창하지만 이것이 꼭 거대담론에서만 논구될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불트만의 말마따나 삶에서 "그때 그때" 선을 결단할 수 있다. 우리는 약자를 억압하기보다 도울 수 있고, 다름을 배제하기보다 포용할 수 있다. 지금 바로 옆에 있는 타인에게도 무심함 대신 따듯한 관심을 표현하는 선의를 발휘할 수도 있다. 우리는 프로그래밍된 의미 없는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창조성을 발현하여 선의 의지를 꽃피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역사가 이상적으로 흐른 것은 아니었다. 역사에는 인간의 죄가 있고, 악이 있고, 하나님의 수난, 하나님의 속썩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두신 희망을 가지고 계시기에, 때로 악마저도 들어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신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모든 일은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은 속을 썩는다. 그러면서 그것을 들어 쓰신다."
하나님은 선이므로 역사는 결국 선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그럼 이 역사는 도대체 어떻게 될까. 기독교는 종말에 대한 관점을 명확하게 가진 종교이다. 따라서 이 죄의 역사, 수난의 역사가 무한히 반복된다고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종말을 2040년, 2050년과 같은 미래를 예측하는 시점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 뜻대로 될" 그때를 종말이라고 본다. 하나님 뜻대로 될 그 종말은 어떤 종말인가? 저자는 "하나님이 사람에 대한 희망을 거두고 끝난다"라고 말한다. 역사가 굴곡지지만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이 처음에 인간에게 두신 그 희망이 결실을 맺을 것이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종말관에 대한 저자의 아름다운 표현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의 시간에는 굉장한 의미가 있다. 우리가 오늘 살아가고 살아내는 시간은 하나님의 희망이 편재해 있는 시간이다. 비록 우리 실존이 불안과 절망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어 의식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시간 속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희망이 있는 시간 속에 있는 존재들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직 종말이 오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아직도 사람에게 희망을 두고 계시다는 얘기이다...그러므로 시간은 원래 희망에 가득 차 있다. 희망에 찬 시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저자는 논문 말미에 마침내 이렇게 밝힌다: "하나님이 선이므로 역사는 결국 선의 승리로 끝날 것이고 선으로 완성될 것이다. 원래 세상은 좋은 것이며, 마침내 좋은 꼴을 볼 것이다."
기독교 휴머니즘은 이와 같은 것이다. 사람이 희망인데, 사람이 희망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희망을 두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도 희망에 차 있다.
*양명수 교수의 논문 소개 시리즈는 이번 편으로 마무리하고, 다음주 부터 [텍스트 속으로]에서는 다른 텍스트를 소개합니다.
북리뷰/서평 문의 theworld@veritas.kr
*책/논문에서 직접 인용한 어구, 문장은 큰따옴표(", ")로 표시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