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하늘을 보아
박노해 (박기평)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가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
시인(1957- )은 인생의 모순을 실현할 길이 "너의 하늘을 보[는 것]"임을 처방한다. 모순을 실현한다는 것은 갈등을 빗는 요소들의 대립을 변증법적으로 해소한다는 뜻이다. 변증법적이란 갈등을 제3의 길로 승화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예를 들면, 창과 방패로서 대립하는 단계를 벗어나 그 둘을 결합하여 위험을 방어하고 신변을 보호하는 무기체계로서 활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모순을 실현하는 원리가 역설이다. 인생에서 역설은 겉으로는 모순되어 보이나, 실질적으로는 진리를 표명하기 때문에 모순을 통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기회를 제공한다. 시인은 인생의 역설을 해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모순에 싸인 삶의 현장에서 자기의 하늘을 본 사람이다. 자기의 하늘이란 자기가 발견한 참 자아, 혹은 진리를 가리킨다.
인생 중에 누군들 자꾸 쓰러지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자꾸 실패하는 이유가 반드시 성취할 것이 있기 때문이란다. 얼핏 모순되게 들리지만, 꼭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자꾸 시도한다는 뜻이다. 목표의식이 있으면 실패에 좌절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인은 좌절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면 목표를 반드시 이룰 것이라고 격려한다. 이는 자신의 하늘을 본 사람의 관점이다.
자신의 하늘로부터 인생을 바라볼 때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인생에서는 구체적인 목표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방향에서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모색하고 지향하지만 마치 깊은 산속에 갇힌 양,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그때는 무엇보다 두려움에 휩싸일 수 있다. 이 경우에 좌절이나 허탈은 절박하지 않은 반응에 속한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내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시 발걸음을 떼서 다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를 길을 나선다면 "네가 가야할 길"을 궁극적으로는 찾게 될 것이다. 하늘의 계시로 일 순간에 자신의 길을 발견하고 정진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헛수고와 같은 모색과 지향 가운데 그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때 길을 찾는다. 놀랍게도 그것은 우리로 권태에 빠지지 않게 하고 생명의 근력을 키워준다. 그 근력은 권태마저도 이기고 위기에 저항하며 인내의 결실을 증명하는 통로가 된다.
그 과정에서 울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차라리 대성통곡하고 싶어도 피맺힌 속울음을 삼켜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 상황을 운명의 굴레인 양 용납하며 체념하기 쉽다. 그러나 그럼에도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시인은 고통스러운 현실에 집중하지 말고 미래와 소망을 바라볼 것을 권하고 있다. "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음]"을 믿을 때 그 미래와 소망이 현재의 눈물을 닦아주게 된다. 이 역설은 현실에서 모순을 실현하기 위해 "다시 울며 가는" 과정 중에 이루어진다. "다시 울며 가[게 하는]" 동력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자꾸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서고, 한 치 앞이 안 보여도 다시 발을 내딛게 하는 동력이 무엇인지도 같이 묻고 있다. 시인은 그처럼 "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라]"고 이른다. "보아"가 '보아라'보다는 덜 직설적으로 들리나 곤경을 이길 길을 알리는 간곡한 충고를 전한다. "너의 하늘"이 그 동력이므로 그것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것이다. 하늘은 외부의 고매한 자리에 위치하지만, 그것이 "너의 하늘"인 이상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속에도 자리한다. 마음속에서 하늘과 동일시되는 대상은 자신의 참 자아이다. 참 자아가 인생의 역설을 입증하는 동력이다.
그러나 참 자아를 바라보는 것이 일상적으로는 쉽지 않다. 그것은 마치 원석처럼 얼핏 보아서는 그 가치를 알 수 없기에 인생의 곤경에 그 어떤 실마리조차 제공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 원석은 자꾸 쓰러지며 길을 잃어도 계속 걸어가고 다시 울며 가는 과정에 그 더께가 갈리면서 빛을 드러낸다. 모순의 굴레에 끼였다가 기어코 빠져나오는 과정을 거칠 때 참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가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 모순되게도, 너무 힘들 때는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가닿는 때이다. 그때 "너의 하늘"은 그곳에서 "네가 꼭 이룰 것"과 "네가 가야할 길"과 "네가 꽃피워 낼 것"을 확인시키며 생명의 힘을 공급한다. 여기서 인생의 궁극적 기쁨이 솟아난다.
우리 모두에게는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가닿는/ [우리의] 하늘"이 있다. 그 하늘을 원석의 상태로 방치하지 않고 인생의 곤경을 통해 그 원석을 갈게 되면 참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안의 하늘을 볼 소질을 천부적으로 갖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 만한 것"(로마서 1:19)을 그 영혼에 심어놓으셨다지 않는가? 따라서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고통스러운 현상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가만히," 즉 현상 때문에 야단스러워지는 마음을 추스르고 "하나님을 알 만한" 능력이 영혼에 심겨져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기억을 더듬으면 현상에 실려 있는 하나님의 뜻을 모색할 수 있다. 그 모색의 과정이 원석을 갈아 참 자아를 드러내며, 그 자아가 인생의 역설을 해명할 생명의 힘을 생성한다.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