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숲
복효근
새들도 떠나고
그대가 한 그루
헐벗은 나무로 흔들리고 있을 때
나도 헐벗은 한 그루 나무로 그대 곁에 서겠다
아무도 이 눈보라 멈출 수 없고
나 또한 그대가 될 수 없어
대신 앓아줄 수 없는 지금
어쩌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눈보라를 그대와 나누어 맞는 일뿐
그러나 그것마저 그대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보라 그대로 하여
그대 쪽에서 불어오는 눈보라를 내가 견딘다
그리하여 언 땅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뿌리를 얽어쥐고 체온을 나누며
끝끝내 하늘을 우러러
새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
보라 어느샌가
수많은 그대와 또 수많은 나를
사람들은 숲이라 부른다
시인(1962- )은 연대 혹은 공동체 의식의 동력이 소망임을 알린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박탈이나 고립의 위협이 없으면 우리는 연대나 공동체 의식을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는 한, 공동체의 형성이 기본값이기는 하나, 소망의 공유가 전제되지 않고는 외형적인 형식만을 갖춘 것에 불과하게 된다. 공동체는 소망을 공유할 때 결속력이 강해진다. 그러나 원래 소망이 현실의 결핍 때문에 미래의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임을 고려하면 소망의 연대가 형성되는 때는 어려운 시절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이 소망의 공유를 촉진하는 와중에 어떤 일원은 상황의 압박을 거슬러 희생을 결행함으로써 연대를 강화하기도 한다.
연대를 형성하는 소망은 생명의 소망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힘만이 결핍이나 박탈을 이겨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의 기본값은 다음과 같다. "새들도 떠나고/ 그대가 한 그루/ 헐벗은 나무로 흔들리고 있을 때/ 나도 헐벗은 한 그루 나무로 그대 곁에 서겠다." 새가 상징하는 희망도 사라지고 고립감만 쌓이면 죽음의 유혹이 편만해지나, 구원은 생명의 결단으로부터 도래한다. 왜 생명의 결단이냐 하면, 죽음의 유혹 앞에 놓인 존재의 처지로 내려가는 것이 생명을 거는 일이기 때문이다. 새들이 떠나고 겨울이 닥쳤으므로 자기도 "헐벗은" 상태인 것은 매한가지일 수 있으나 "그대 곁에 서겠다"는 연대의 결정이 죽음을 무릅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죽음에 대해서 죽음으로 맞서는 것은 생명이 구사하는 역설이다.
그 역설은 대가를 전제하고 있지도 않다. 그 역시 생명의 속성이다. 굳이 대가를 따지자면 생명의 대가는 생명일 수밖에 없다. 사실상 생명은 거저 준다. 특히, 불가피한 경우에 생명은 이유나 명분을 내세우지도 않고 그 자체를 희생한다. "아무도 이 눈보라 멈출 수 없고/ 나 또한 그대가 될 수 없어/ 대신 앓아줄 수 없는 지금/ 어쩌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눈보라를 그대와 나누어 맞는 일뿐"이다. 여기서 "그대"를 죽음을 맞게 된 존재로 보면 "나"는 "그대"로 인해 죽음 앞에 서고자 한다. 대체불가능한 실존적 고립의 조건은 죽음으로만 대처할 수 있는데, 그런 상황을 그저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 곁에 서서 함께 앓으며 죽음을 맞고자 한다. 하지만, "나"는 눈보라를 나누어 맞고자 할 뿐 "그대"에게 요구하는 바가 없다.
"그러나 그것마저 그대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대"가 홀로 맞을 눈보라를 나누어 맞고자 했더니 내가 홀로 맞아야 했을 눈보라를 사실상 나누어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맞을 눈보라를 나누기 위해 계획적으로 "그대" 곁으로 다가간 것은 아니었다. 본래 의도는 "보라 그대로 하여/ 그대 쪽에서 불어오는 눈보라를 내가 견[디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언 땅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뿌리를 얽어쥐고 체온을 나누며" 서로에게 생명의 힘을 공여하게 되었다. 그러한 연대의 실행은 "나"로서는 죽음의 자리로 나서는 것이지만, 그로써 나의 생명을 제공한 대로 "그대"로부터도 생명을 공여받게 된 것이다. 그 생명력은 뿌리가 서로 얽히는 결합의 강렬함 만큼이나 언 땅속을 오히려 녹일 듯하다. 그 결합은 관능적 심상을 넘어서 새로운 생명의 배태를 암시하고 있다. 시인은 연대가 결국 생명의 배태를 위한 결합이며 소망의 행위임을 알린다. 왜냐하면, 그로써 "나"와 "그대"는 "끝끝내 하늘을 우러러/ 새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새들을 기다린다는 것은 눈보라가 그칠 미래를 확신하며 현재의 곤경을 견디겠다는 표시이다.
그렇게 소망을 품을 때 "보라 어느샌가/ 수많은 그대와 또 수많은 나를/ 사람들은 숲이라 부른다." 비록 애초에 연대의 확산까지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지만, 소망이 새로운 생명의 배태를 암시하듯이 또 다른 관계가 형성된다. "어느샌가" 그런 일이 벌어졌으므로 연대의 결정이 이 결과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곤경에 의해 촉발된 소망이 연대를 결정하게 했고, 그 결정이 생명을 건 것이었던 만큼 새로운 결실을 소망하게 한 것뿐이다. 그 결실은 무수한 "나"와 무수한 "그대"가 만든 공동체이며 소망으로 조성된 생명의 "숲"이다.
신앙생활에서도 연대나 공동체의식은 본질적이다. 신앙 자체가 하나님과 인간의 연대 없이는 불가능한데, 연대의 결정은 하나님이 먼저 내리셨고 실행하셨다. 그리하여 죄와 죽음의 눈보라 때문에 생명의 소망도 떠나고 곤경을 맨몸으로 견뎌야 하는 상황에 하나님은 대체불가한 인간의 운명을 짊어지고 그 눈보라를 나누어 맞으셨다. 그 과정에 "언 땅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뿌리를 얽어쥐고 체온을 나누며/ 끝끝내 하늘을 우러러/ 새들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 결과, 그 연대는 생명의 숲을 이루었다. 신앙생활은 이러한 정신과 과정의 재현이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이르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5). 포도나무와 가지의 불가분의 연대가 열매를 많이 맺게 하듯이 하나님과 인간의 연대는 그 관계 자체의 결실뿐만 아니라 이웃과도 소망의 연대를 이루게 한다. 그러나 그분을 떠나면 새들도 떠나버린 땅에서 헐벗은 나무로서 눈보라를 홀로 맞으며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