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얼마 전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제5장 교회내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칙령을 발표하여 그리스도교가 이제 자유롭게 되어서 교세를 강화하고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로마제국에 공헌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과거에 박해를 겪으면서 생긴 문제와 신학 문제의 시비를 가리려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전에는 가질 수 없었던 교회회의를 열어 논쟁하였고, 이로 인해 교회의 내분이 형성돼갔다.
1. 도나투스 논쟁
도나투스(Donatus) 논쟁과 성질이 같은 논쟁이 로마교회에서도 있었다.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 로마교회의 감독 코넬리우스(Cornelius)가 박해 때 신앙을 버린 배교자들을 교회에 무조건 용납하려고 하였을 때 이것을 반대한 신도들이 노바티안(Novatian)을 감독으로 선출하였다. 노바티안은 많은 배교자들을 자기에게 오게 해서 그들이 회개와 세례를 다시 거쳐 교인이 되게 하였다. 노바티안을 지지한 신도들이 북아프리카와 동쪽 시리아 그리고 서방에도 생겨서 그의 교파가 5세기까지 존속하였다.
도나투스 논쟁이 생긴 북아프리카 칼타고 교회는 그전부터 교회의 기강을 엄격하게 한 터툴리안과 키프리아누스 감독이 있었다. 그들은 이단자들이 교회에 다시 돌아오려면 반드시 세례를 다시 받게 하였다. 그들은 이단자 교회에서 받는 세례는 무효일뿐더러 배교자들도 재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그 교회는 당시 분열되지 않았던 하나의 가톨릭교회를 두고 한 말이었다.
도나투스 논쟁도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 있었던 배교자에 관한 문제였다. 칼타고 교회 감독 멘수리우스(Mensurius)는 성서와 교회의 문서들을 로마관원들에게 내어주었다는 의심을 받았는데 자기는 이단문서만을 내어주었고 관원들은 그 문서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가져가서 불태웠다고 말하였다.
멘수리우스의 후계자 캐킬리안(Caecilian)도 멘수리우스와 같은 의심을 받은 사람이었는데, 311년에 그를 안수할 때 펠릭스(Felix)라는 배교자로 알려진 감독이 다른 감독 후보자들을 제쳐놓고 마땅히 참석해야 할 감독들의 참석도 없이 불법으로 안수를 단행했다. 그리하여 캐킬리안은 배교자일뿐더러 불법으로 감독이 된 사람이라 하여 그를 배척하는 감독들 70인이 모여서 마조리우스(Majorius)를 감독으로 세워서 감독 두 사람이 대립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칼타고를 중심으로 북아프리카 교회는 어지럽게 되고 분열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캐킬리안의 배교 여하를 가리는 문제였지만 그보다도 심각하고 근본적인 신학문제가 되어서 그 논쟁이 가열되어 장기화되었다. 그것은 배교자 감독이 집행하는 교회의 갖가지 의식 곧 세례식과 성만찬과 축도 행위 등의 효력 유무에 관한 문제였다.
칼타고의 감독이었던 키프리아누스는 성직자가 죄를 지으면 그가 행하는 모든 예전은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로마교회는 키프리아누스의 엄격주의에 반대하고 한때 배교자였던 감독이 집행한 안수식과 예전도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키프리아누스의 주장을 이어받고 로마교회의 주장에 맞서서 316년에 도나투스를 감독으로 세웠다. 그리하여 이 엄격파의 운동이 그의 이름을 따서 불리게 되었다.
칼타고 교회는 로마교회의 교구에 속해있던 한 지방교회여서 이 논쟁이 로마교회의 문제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이 논쟁이 그리스도교계를 소란스럽게 하고 분열시키는 것을 염려하여 문제 해결을 위하여 배려하고 교회 회의를 열게 하는 등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였다. 회의에 참석할 감독들이 영국처럼 먼 곳에서 오는 경우에는 마차를 보내기까지 하였다. 이 논쟁의 해결을 위하여 교회 회의가 무수히 열렸고 로마가톨릭교회는 도나투스파와 화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결국 도나투스파는 황제의 포고령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됐다.
황제의 포고령을 위반하는 교회와 사람은 벌금을 물어야 했으므로 도나투스파는 많은 벌금을 물게 되었다.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국가의 법적 제재도 심해감에 따라 그들은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에게 폭행을 가하고 파괴행위까지 저지르며 폭력적으로 반항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빈민층이 지주층에 대항하고 북아프리카인들이 로마정권에 반항하는 운동으로도 변모해갔다. 도나투스 논쟁은 상당 기간 지속되었으며 5세기 초 도나투스파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간의 논쟁은 유명하다.
도나투스파는 6세기 말에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족 지방에서 부흥해갔다. 북아프리카 지방의 가톨릭교회 감독들은 로마교회의 감독 즉 교황의 교권 아래 있으면서도 도나투스파를 압박하라는 교황의 명령을 신실하게 이행하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도나투스 논쟁에서 북아프리카 교회가 일종의 지방색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로마교회의 권위에 대항하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도나투스 논쟁처럼 장기간 지속된, 그리고 심각하고 격렬했던 논쟁은 없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교계와 사회의 평화를 이유로 들며 이단자와 배교자라도 재세례의 절차 없이 교회에 받아들이고 그들의 베푸는 성례전도 효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도나투스파는 시편 141:5의 말씀대로 ‘죄인이 붓는 기름으로 내 머리에 안수할 수 없다’고 하여 배교자와 죄인으로 인정된 성직자의 모든 성직 행위를 배격하였다. 가톨릭교회는 누가 집행하든지 성례전은 그 자체 집행만 되면 효력이 있다고 주장하였고 도나투스파는 집행자가 무죄하고 결백해야 효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성립된 로마가톨릭교회의 성례전 신학이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고 어거스틴도 이 신학에 동의하였다. 도나투스파 교회는 100년 동안 저항하다가 결국 쇠퇴하였으나 7세기에 아시아의 회교 국가가 북아프리카를 정복하고 들어갔을 때까지도 도나투스파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