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얼마 전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제7장 그리스도교의 넓은 판도
1. 로마교회의 동서분립
로마제국의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하여 두 사람이 서방과 동방으로 그 나라를 나누어서 통치한 적이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 직전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그가 황제였을 때 있었고,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셋이 통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330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비잔티움 지방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콘스탄티노플에 새 도시를 건설한 후 옛 수도인 서방의 로마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종전의 권세와 영예가 쇠퇴해갔는데 특히 동쪽 아시아의 페르샤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콘스탄티노플이 주요한 군사기지가 됨으로써 로마제국의 군대가 대량 동방으로 집결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서방 로마는 북방의 고스족의 침략을 막을만한 충분한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하였고 로마시는 옛 수도로서 이름만 가지게 되고 서방의 황제는 라벤나(Ravenna)에 주재하고 있었으므로 로마시를 수비할 별도의 군대는 유명무실하였고 라벤나를 지키는 군대도 빈약하였다.
410년에 로마시가 고스족의 침략으로 함락하였을 때 테오도시우스 1세의 두 아들이 동서로 그 제국을 나눠서 다스리고 있었는데 서방은 호노리우스(Honorius)가 다스렸고 콘스탄티노플은 아르카디우스(Arcadius)가 통치하였다. 서방은 그 전에도 고스족의 침략으로 전쟁이 많았고 고스족은 가능하면 로마제국과 우호관계를 가지고 남쪽으로 이주할 땅을 얻고자 하였으나 로마제국은 그들을 야만시하고 로마제국의 영예를 지키려 했다. 고스족의 왕 알라릭(Alaric)이 사절을 호노리우스에게 보내어 양편의 전쟁포로를 교환하여 돌려받고 휴전을 체결하고자 했으나 호노리우스가 거절했다. 호노리우스의 완강한 정책이 로마인들의 불행과 고통을 더할 뿐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대립황제를 세우고 알아릭과 협상하여 잠시 평화로운 때가 있었지만 대립황제는 실정으로 끝났고 알아릭은 라벤나의 호노리우스와의 평화협상을 단념하고 로마시를 함락시키기로 결심하였다.
알아릭의 군대가 밤중에 로마시의 성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가 천둥 같은 함성을 지르고 고스군의 나팔을 불어 시민들을 경악시켰고, 로마시를 완전히 장악하여 파괴하고 불지르고 약탈하고 시민들을 노예로 잡아갔다. 이렇게 하여 인류의 역사상 유례 없이 큰 영토를 점유하고 문명의 발달에도 상당히 공헌한 한 제국의 수도 로마가 건국된지 1163년만에 외침으로 완전히 함락되었다. 이것은 이태리 라틴민족이 영화와 번영을 구가하던 로마제국의 몰락의 전조였다. 불멸의 영원한 도성으로 자랑하던 로마제국 수도를 멸망시킨 고스족은 이태리 북쪽에 살던 게르만족(German)과 스키디아족(Scythia)이었다. 알아릭은 로마를 함락시키고 승전한 배상으로 이태리의 시실리섬을 얻어 고스족은 토지가 비옥하고 평화스러운 이 섬에 정착하게 되었다.
로마시의 함락이 서방 로마제국의 비운을 가져왔지만 로마시를 함락시킨 알아릭 고스족 왕은 신중하게 사려하여 단 6일만에 로마 점령을 끝내고 철군하였다. 그의 군인들이 로마의 관공서와 부유층 가정에서 금은보화를 탈취해 갔고 많은 주요 건물이 파괴되고 불탔지만 알아릭은 베드로성당과 바울의 성당은 파괴하지 말라고 명령하여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몇몇 고스군인은 회심하여 그 성당에서 경건을 표시하였다.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Gibbon)의 진술에 따르면 놀라운 일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노파 수녀가 수도원의 값진 성물들을 한 고스군인의 강요에 따라 내어주면서 이 성스러운 물건들은 성 베드로의 것이니 만일 당신이 이것들을 빼앗으면 당신의 양심에 당신의 신성모독 행위가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때 그 군인은 어떤 두려움이 갑자기 생겨서 알아릭에게 이 물건들을 보고하였고 알아릭은 그 모든 성별된 물건을 파손하지 말고 도로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고스군인들이 그 성당에 돌려줄 보물들을 머리에 이고 큐리린날(Quririnal) 언덕에서 바티칸 언덕의 베드로성당이 있는 곳으로 긴 행렬을 지어 진군하였고 이 광경을 본 그리스도인들이 집에서 뛰쳐나와서 합세하여 그 행렬을 성대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이 로마의 위대성이 무너진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말할 만하였다는 것이다. 알아릭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스족에게 이미 복음이 전파되어 있었던 것이다.
서방 로마제국은 고스족의 침략 이후 계속적으로 다른 야만족의 침략을 받아 무력해져 갔고, 라벤나의 마지막 서방 황제는 476년에 오스트로고스족(Ostrogoth)의 침략을 받고 패배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Romulus Augustus)였다. 그리고 서방 로마제국 황제의 통치권 안에 있던 발칸반도 서쪽 지역과 북아프리카의 영토는 대부분 야만족들의 손에 들어갔다. 동방제국의 황제도 서방의 야만족들을 물리칠 힘이 없었다.
로마제국의 정치적 상황이 이렇게 됨에 따라 교회의 성격에 변화가 왔다. 동방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의 세력이 변화가 없이 황제가 교회의 신학논쟁에도 깊이 관여하여 교회회의를 소집하고 이단자를 처벌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하여 동방교회는 황제의 권력 아래 자주성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에 서방에서는 라벤나에 동방의 황제의 대사가 파송되어 있었으나 그는 정치적으로 무력하여 로마인들을 보호할 힘이 없었고 그 대신 로마인들은 로마 교회의 감독의 정치적 및 종교적 지도를 받게 되어서 로마 교회와 감독의 교권이 점점 강화되어 갔다.
서방 로마제국이 몰락한 원인을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북방 야만족들의 침략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침략을 막지 못한 내부적인 원인들이 있다고들 말한다. 이를테면 기후 변화로 농토가 불모지로 변하여 농사가 타격을 받아 경제사정이 악화되었다든지, 생산에 종사하는 인구는 감소되고 군대와 공무원의 수가 배로 늘었다든지,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의 납세가 태만해져서 국고가 빈곤해졌다든지, 성직자와 수도사 등의 독신자들과 종교단체에 대한 세금 면제로 국고 수입이 줄었다든지, 혹은 민족적 혼혈이 늘어나서 로마인의 정체성이 희박해졌다든지 하는 이론 등등이 있으나 어거스틴은 그 어떤 원인보다도 로마인의 도덕적 부패와 타락이 큰 원인이라고 말하였다. 도덕적 부패는 공직자들의 행정 부패와 군대의 포악성과 귀족들의 사치와 낭비를 들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 자유화 초기와는 달리 국가 공직에 복무하는 그리스도인의 수가 적어졌다는 지적도 있다. 이 모든 원인 분석이 다 부분적으로 가당할 수 있겠지만, 신앙의 눈으로 로마의 멸망을 지켜본 어거스틴이 이 지상에 영원한 도성은 있을 수 없다고 한 역사 해석이 옳은 것이었다.
동방교회의 판도에 들어가는 지역은 발칸반도, 이집트, 소아시아, 팔레스틴,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등이고 서방교회의 판도에 들어가는 지역은 이태리, 스페인, 북아프리카, 고울(오늘의 프랑스), 영국, 아일랜드 등지였다. 그리고 각 지방의 교회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해갔고 교구가 있고 감독이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국제적인 5대 도시 곧 로마, 예루살렘,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에 총대교구가 있고 총대주교가 그 총대교구를 관할하였다. 그리고 중요한 교회 문제가 있으면 세계 교회의 전체회의 곧 에큐메니칼 회의를 열어서 해결해갔다.
무엇보다도 공동신앙고백을 채택해서 공동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성서의 편찬도 완료되어 같은 성서를 사용하게 되었고, 교회의 행정제도와 절기와 기강 문제도 되도록 동일한 것이 되도록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