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김재진
베어진 풀에서 향기가 난다.
알고 보면 향기는 풀의 상처다.
베이는 순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비명 대신 풀들은 향기를 지른다.
들판을 물들이는 초록의 상처
상처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나는
아픈 것도 잊는다.
상처도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
시인(1955- )은 상처를 "저토록 아름다운 것"으로 본다. 이 역설적 세계관에는 자신의 상처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원래 상처는 해부학적으로 조직의 연속성이 단절된 상태를 가리킨다. 크든 작든, 상처는 연속성의 단절이 그 표시이므로 아름답지 않다. 단절을 거론하자면, 상처는 정서적 단절뿐만 아니라 관계상의 단절과 심지어 미래의 가능성의 단절까지도 환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설은 상처가 아무리 크더라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재결합의 증표도 될 수 있다고 알린다. 마음은 해부학적, 정서적, 관계상, 삶의 전망상 단절을 모두 역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상처를 극복한 감정, 깨진 관계의 회복, 실패를 딛고 선 기대 등은 상처를 "저토록"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시인은 풀의 상처를 들여다보면서 자기 내면의 상처의 의의를 깨달았다. 실제로 상처가 아름다울 수는 없지마는, 그 역설에 그의 마음은 위로를 받는다.
"베어진 풀에서 향기가 난다." 베어진 풀의 향기가 들판에 가득할 정도라면 이전에 들판에서는 풀을 베는 작업이 벌어졌다. 뽑는 것을 벤다고 말하지 않으니까 집약된 노동이 투여된 예초 작업이 전개되었었다. 풀을 왜 베었을까? 아마도 베어진 풀은 처단당한 것이 아니라 꼴이나 퇴비로 사용될 듯하다. 단순히 제초하는 경우라면 그 죽음의 냄새를 누구도 향기로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그 작업의 완결이 감상적 순간을 순식간에 삭제해버릴 터이다. 그러나 들판에는 향기가 가득했다. 이는 풀이라는 외형 안에 담겨 있던 생명의 수액이 바깥으로 전이되는 상황이다. 생명이 전수되는 절차가 진행된 셈이므로 거기서는 향기가 날 수밖에 없다. 사실, 어떤 목적으로 풀을 베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시인은 들판에서 향기를 맡았다. 그 향기에 취한 것을 보니까 그의 마음은 생명적 상상력을 가동하고 있은 듯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향기는 풀의 상처다." "알고 보면"은 상상의 세계에다 사실적 정보를 도입한다. 마음이 아니라 육안에 비친 물리적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사실적으로 보면, 그 향기는 풀의 상처가 내뿜는 초록의 피가 공중에 산포하는 냄새의 알갱이이다. 그 알갱이들이 그의 마음의 코에 흡입되어 향기로 느껴진 것이지 "알고 보면" 풀들의 시체가 풍기는 화학 성분의 유포일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상처에서 향기를 맡을 수 없다. 게다가 그 상처는 예초기의 폭력에 의한 것이지 않은가? 이처럼 상처에 집중하면 생명의 냄새를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향기를 맡았다. 생명적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베이는 순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비명 대신 풀들은 향기를 지른다." 사람들이 상처에 비명을 지르는 것이 사실적 정보라면, 풀들이 향기를 "지르[는]" 것은 그들이 물리적 비명을 넘어서 있음을 알린다. 그 향기는 죽음의 후각적 비명이 아니다. 풀이 "지른" 향기는 청각과 후각을 아우르는 공감각적 공간을 창조한다. 그런 상상력은 현상을 왜곡하거나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본질을 통찰하고 있다. 베인 상처가 풀의 외형에 갇혀있던 생명을 누출함으로써 생명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상처를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표시로 인식하는 것이 생명적 상상력이다. 그는 그 상상력의 눈으로 상처를 보고 있다.
그 눈에는 "들판을 물들이는 초록의 상처"가 보인다. 이제는 후각과 청각의 공감각적 공간이 시각화하기까지 한다. 사실상 온 감각이 모두 동원되었으므로 실제적인 공감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풀의 상처에서 자기의 상처를 보았다. 자기의 상처는 물리적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통증도 안겼다.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고 들판을 찾았을 수 있으나 그는 풀의 상처에서 향기를 맡음으로써 자신과 풀의 경계를 넘어 베어진 풀에 공감하게 되었다. 풀의 상처에서 향기를 맡은 대로 자신의 상처에서도 향기를 맡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처가 만든 후각과 청각의 공감각적 공간에 진입했다. 이전에 그 상처 때문에 죽음의 비명을 질러댔다면 이제는 그 상처가 "지르는" 향기, 즉 상처가 생명의 표시임을, 자신이 살아 있고,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들판을 물들이는 초록의 상처"는 마음의 들판에 자신의 상처가 "지른" 향기가 가득한 순간을 대변한다. 그 공감의 순간에 "상처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나는/ 아픈 것도 잊는다." 베어진 풀은 그에게 '상처 입은 치유자'(a wounded healer)인 셈이다.
향기에 취해 잊게 된 "아픈 것"은 풀의 상처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처이기도 하다. 상처를 생명적 상상력의 눈으로 보니까 상처의 물리적 상태에 집중하지 않고 그것이 품고 있던 생명의 의의를 성찰하게 되었다. 살면서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들판을 물들이는 초록의 상처"는 어쩌면 인생의 들판을 가득 채우는 상처들의 현장을 생생하게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상처에서 향기를 맡는 마음이 중요하다. 물론, 그것이 의지로만 가능하지는 않다. 아마도 상처의 극심한 고통을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며 들판으로 달아나고자 하는 순간에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인지 모른다. 게다가 그런 마음을 가졌다가도 잊어버리고 또 다시 그런 마음을 갖게 되는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행착오 끝에 마음에다 새겨놓을 것은 상처에서는 생명의 향기가 뿜어나온다는 사실이다. "상처도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 상처는 살아 있으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만의 표지이다.
이러한 생명적 상상력이 상처에서 향기를 맡게 한다. 현실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그 마음은 달라진 현실을 당겨서 살게 한다. 따라서 그 마음이 허황된 공상의 세계로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상처조차도 자신의 삶의 일부로서 긍정할 필요가 있다. 상처도 자신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게 할 통로인 것이다. 성경이 마음을 지킬 것을 가르치는 이유도 같은 취지이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자신의 상처에서도 삶의 연속성을 찾고 아픈 것들에 공감하려는 마음이 생명의 근원을 지키는 길이다. 아픈 것을 보고서 아픔을 잊게 되는 역설이 생명의 근원을 대변한다. 그 때문에 "상처도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